"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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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번역한 시들 》 『알콜 중독자』를 업로드했습니다.


지난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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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6 번역한 시들 》 『속 빈 자들』을 업로드했습니다.
22/01/15 시집: 안과 밖의 500 》 『느낌』을 업로드했습니다.
22/01/14 시집: 물에 배 》 『펑!』을 삭제했습니다.
22/01/14 시집: 물에 배 》 『환호성』을 삭제했습니다.
22/01/14 시집: 물에 배 》 『어느 소설과 어느 시 사이에서』를 삭제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면서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다시 시작해서 성공하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칼 드레이어


22/01/11 시집: 물에 배 》 『잠자는 얼굴을 바라보다가』를 업로드했습니다.
22/01/10 시집: 물에 배 》 『유람선 난간을 붙잡은 두 사람의 대화』를 업로드했습니다.
22/01/09 번역한 시들 》 『내가 화가가 아닌 이유』의 번역을 수정했습니다.
22/01/08 번역한 시들 》 『내가 화가가 아닌 이유』를 업로드했습니다.
22/01/06 시집: 물에 배 》 『이틀 간 쓴 3부작』를 업로드했습니다.
22/01/05 시집: 물에 배 》 『모뉴먼트』를 업로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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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1/12/31 번역한 시들 》 『노래』를 업로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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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물에 배
시인의 말

물과 배는 제각각이다.
그 위에 사람이 타고 있다.

보트 위의 둘과 북

조그맣고 흰 보트 위에
여자는 누워 있고,
남자는 큰 북을 세워 치고 있다.

크고 흰 북채의 끝이
국화 송이처럼 소복한데
둥둥—
울리는 소리는 매섭다.

여자는
간헐적으로 경기를 일으킨다.

노 없는 보트가
말 없이 흘러간다.

강물의 뚝뚝 끊긴
가로 줄무늬를 따라.

누군가는
윤슬
이라는 이름으로
그 무늬를 아름답게 묘사할 테지만

이곳은 움직이는
죽음의 장소,
아름다움과의 병치를 통한 역설은
사치스럽다.

가로로
가로로 흘러가다가

배가 선다.

멈췄다는 말이 아니라
일어섰다는 뜻이다.

오데트처럼,
나사로처럼.

여전히
남자의 엉덩이는
보트 바닥에 붙은 채 벽에 박힌 못 같았고,
여자는 누웠지만
선 것이고,

죽은 지 얼마 안 됐지만
산 것이고,

눈물이 흘렀지만
가로로
가로로
흘러간 것이고,

슬펐지만 기뻤던 것이고, 놀랐지만 놀랍던 것이고, 기적이란 말이 차마 목구멍을 떠나 입술과 혀에 도착하지 못 했던 것이고, 혼이 이곳을 떠나 저곳에 이르지 못 했던 것이고, 둘의 재회가 내생으로, 먼 미래로 약속되는 것이 기약 없이 지연됐던것이고, 중력이 물리 법칙의 일원이란 사실이 어느새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이고,














.

비가 내렸다.
누운 북 위에 쌀 튀기는 소리를 내며.

유일한 사랑에게 말하는2

배 타러 가다 강도를 만났다.
모자와 코트를 뺏겼다.
집에 돌아가긴 늦었고.
꼭 타야 하는 배였다.
밤이 두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탔다.
배 타기 전 낚시를 했다.
배 옆에 조그만 플라스틱 의자를 깔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어린 고기 몇 마리를 잡고 놓아주었다.
시간이 남아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배 타기 전 꼭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란 뜻.
집에 갔다 오느냐, 낚시를 하느냐
성립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우린 질문 없이 많은 일을 하고 낚시도 그렇다.
일단 앉고.
앉아 있다 이제 됐다 싶으면 배를 탄다.
탔다.
코트와 모자 없이.
춥겠지.
춥겠다.
그런데 뭐?
벌어진 일이다.
돌이킬 수 없다.
출항.
얼어죽는 게 무섭다면 집에 돌아갈 게 아니라
얼어죽는 게 전혀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가 중요하다.
강도는 모자와 코트를 가져갔지만,
코트 안에 든 지갑과 그 안에 든 돈과 신분증도 가져갔지만
내 셔츠 윗주머니에 이런 이해를 몰래 꽂아둔 셈이다.
폭력의 얼굴을 한 사랑.
둘의 교집합.
덜덜 떠는 밤
언 몸을 쓸어내리던 손이
우연히 가슴팍에서 발견하고
어쨌든 배가 전진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뱃사람의 생활 방식.
항상 누군가 죽고, 누구는 얼어 죽기도 한다.
안팎 모두에서.
그렇다.
참치도.
꽁치, 갈치, 황새치,
고등어, 상어, 뱅어.
모든 치와 어들
모두.
더 말할 것 없다.
언제나 준비돼 있다.
뱃사람의 집은 배다.
돌아간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말 뿐인 말이다.

꿈에
집에 있는 아내를 만나 잘 지내냐고 물었다.

반투명

아들이 피우던 담배를 아버지가 건네 받는다. 둘은 부두의 하역노동자다. 앞에 바다가 있다. 말 없이 바다를 보다가
걷는다. 바다를 옆에 두고. 고요히 철썩이는 파도. 움직인다. 아들이 그 옆. 아버지가 더 안쪽. 순서에, 운동의 방향에 어떤 의미가 담겼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셋 중 누구도. 그들 옆을 왕복하는 파도. 파도의 운동 방향과 수직으로 걷는 둘. 앞으로. 앞으로. 담배.
담배
연기는 솟는다. 또 다른 방향으로. 곡선을 그리며 상승한다. 반투명하게. 알듯 말듯. 사라지고.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겐 이름 뿐이다.
속에 든 것을 꺼낼 수 없지.

그건 범죄야.”

상상

유통 방식에 대한 걱정은 어부들이 잡을 어종에 영향을 미친다. 유통에 대해 아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원하는 어종에만 집중하는 건 늘어진 팔자들의 취미 낚시에나 해당되는 얘기다. 우리가 어획 행위만으로 유통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없다. 매우 비좁은 길이 하나 있긴 하다. 특별한 효능을 가졌지만 개체 수가 많지 않은 어종을 오직 나만이 독점적으로, 또 꽤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면 나는 유통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새로운 유통망 하나를 개척하는 것. 기존 유통망과 별개로. 공급자가 여럿이라면 모를까, 내가 유일한 공급자라면 유통업자들은 모두 내게 어느 정도는 종속된 을의 위치에 설 것이다. 물론 그들도 나로 인해 꾸준히 만족할 만한 이득을 얻어야 할 것을 전제로. 그들은 내게 관리 대상이지, 압제의 대상은 아니니까.

창고

우리는 축적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장 필요없는 것을 쌓아놓으려는 것 말이다. 고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 세대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 인류에게까지 고통을 물려주려 한다. 계속 뭔가 남기는 것 말이다. 이를테면 기록 같은 것들. 그들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지고, 등은 굽고, 눈이 앞을 보지 못한다. 과거에만 고개를 파묻은 거북이처럼.

고개를 빼야 한다.
다시 넣어야 한다.
또 빼야 한다.
다른 이유로 넣어야 한다.
같은 이유로 빼야 한다; 앞을 보기 위해.

배 갈아타기

빨간 배를 타던 시절. 나는 젊어서 소설 한 권을 썼다. 배의 선장이 큰 고래와 싸우다 잡아먹히는 결말로 끝나는 소설이다. 내가 탄 배의 선장도 내 책을 읽었다. 선장은 심기가 불편했다. 배 안에서 글 쓰는 일을 금지시켰다. 내 젊은 시절은 생선비늘 손질로 보냈고 내 중년은 신입들에게 생선 손질을 가르치는 일과 보관을 감독하는 일로 전부 지나갔다. 더 늙으니 두려울 게 없어졌다. 선장 역시 두렵지 않았다. 글을 다시 썼다. 묵었던 세월이 봇물처럼 터져나올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신 잠든 시간에 은은한 빛이 다시 드리워졌다. 기나긴 노년을 꾸준한 집필로 채웠다. 그러던 중 선장도 되고 고래도만났다. 바다 건너 피부색이 다른 선원들 중에도 내 이름을 들어본 이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내 배에 새로 탄 선원에게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파란 배를 타던 시절. 나는 악사였다. 고된 노동에 찌든 이들로부터 억지로라도 힘을 끌어내는 게 내 임무였다. 나 역시 힘든 날이 있었지만, 억지로라도 노래 불렀다. 고래고래. 모두 날 좋아했고, 원숭이라고 불렀다. 원숭이처럼 탬버린을 두들기고 원숭이처럼 노래 불렀다. 가슴 속 뭉친 것들이 노래 부를 때 비로소 녹아 없어졌다. 노래 부르지 못하는 날이면 몸이아팠다. 그런 날이면 포도주 한 병, 담배 한 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갑판에 의자를 펴고 온종일 앉아 있었다. 구름 움직이고 물 넘실대는 모습을 쳐다보며 마시고 피웠다. 속눈썹 위로 빗방울 떨어질 때면 벅차오르기도 했다. 말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노래 부르지 않으면 항상 비가 왔다. “원숭이가 비를 맞네! 원숭이가 비를 맞네!” 벽 없는 곳을 울리던 메아리. 노래 불렀다.
노란 배를 타던 시절. 나는 온화한 기후의 남쪽 나라서 평생을 보냈다. 배 밑 물은 흘렀지만 사람은 흐르지 않던 곳이었다. 사촌과의 혼인은 예사고, 친형제 자매 간에 가정을 이루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유전병을 고스란히 보존하였다. 홍역 같은전염병 역시 마치 마을 중심에 파논 우물이라도 되듯 모두가 공유했다. 언청이가 마을의 삼분의 일이었고 곰보 자국 없는얼굴 드물었다. 제정신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뒤섞여 있었다. 그건 한 개인의 내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관을이고 가는 한 가족의 사진을 찍어준 일이 있다. 관 뒤를 따르는 영정사진 속 나이든 여자는 아마 그들의 엄마인 동시에 고모, 이모인 동시에 사촌 누이일지 몰랐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웃으면서 우는 얼굴. 사진엔 얼굴과 얼굴 속 눈과 눈 속 마음과 마음 속 혼란이 함께 담겼다.
초록 배를 타던 시절. 나는 배를 자주 갈아타던 사람이었다. 신기했다. 채도와 명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갈아타는 배마다 전부 초록이었다. 덜 초록, 더 초록, 덜덜 초록, 더더... 그 시절, 자주 갈아타면 영원히 타는 것이라 믿었다. 사람들도 자주 바뀌었다. 함께 잘 지내기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 무수한 가깝고 먼 거리들. 편차와 수준들.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다. 나는 자주 갈아타는 사람이었으니까.
갈색 배를 타던 시절. 나는 사람보다 배에 더 관심이 있었다. 「배는 왜 가라앉는 대신 뜰까」가 내 주된 관심이었다. 과학이 전부 설명해 주었고 나 역시 그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강의도 해줄 정도였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계속 남았다. 공유해 보았지만 누구 하나 공감하지 못 했다. 때론 내가 미친 사람처럼, 의문이 낫지 않는 병처럼의심되기도 했다. 모두 잠든 밤 혼자 하는 낚시로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밤, 팔짱 끼고 낚싯대 앞에 앉아 졸던 중이었다. 내 옆으로 배에 새로 탄 한 사람이 앉았다. 그 역시 낚싯대를 드리웠다.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와 내가 같은 물음을 가졌고 그 역시 고립이 두려워 배를 갈아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린 사랑보다더 큰 무엇에 함께 휘말렸다. 살 날보다 산 날의 반의 반도 안 남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 놓인 시간의 밀도는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다시 없을 날들이었다. 의문이 여전히, 고스란히 의문인 채로 남았음에도. 우리 둘 다 다른 배를함께 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벌써 알았지만 발설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은 배를 타던 시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탄 이 배는 몇 번째 배일까. 몇 번 더 배를 갈아타야 할까. 내 나이는아주 많았다. 내가 탄 어느 배보다 많았고 심지어 배의 발명보다도 내가 더 오래되었다. 만난 사람의 수는 세상에서 가장긴 영화필름의 프레임 수 전부보다 많았다. 차라리 그 필름 옆 뚫린 퍼포레이션의 수에 더 가까웠다면 가까웠다. 자랑이아니다. 비 오는 날이면 그 얼굴들이 빗방울처럼 내 등허리에 내려와 무겁게 고여 있었다. 바다의 물방울들이 하나하나가전부 비로 몸을 바꿔 악다구니를 쓰는 것 같았다. 배가 물 위에 뜬 탓.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참았다. 선장에게 그럴싸한 사정을 둘러대고 배에서 내렸다.
행복했다. 배에서 내렸다는 것만으로. 같은 잠을 자고 같은 밥을 먹었지만 같지 않았다. 그렇게 같은 같지 않은 날을 무수히 보냈다. 같지 않은 기쁨과 같지 않은 슬픔과 같지 않은 상쾌와 같지 않은 나른. 같지 않은 기쁨과 같지 않은 슬픔과 같지 않은 상쾌와 같지 않은 나른. 같지 않은 기쁨과 같지 않은 슬픔과. 같지 않은. 다시 배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배였다. 다시 시작하기에 꼭 알맞는 색깔이라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초록이고 또... 여태 모든 배를타기 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제 깨달았다. 이건 새로웠다.

장례 가는 배

그리고 나는 오직 배 안에서, 떠가는 물 위에서
행복했고,
뭍에서 그러지 못 했다.

굳이 우열을 가르면
떠나는 곳이 도달한 장소보다 조금 나았다.

...검은 천의 흐름 위로 얼굴들이 넘실대었고, 몸과 마음이 병들어 창백하게 주름진 이들도 몇 섞여 있었다. 기침하는 손이말아쥔 손수건. 피 섞인 가래. 누가 누구를 추모한다는 건지. 그러나

누군들.

물에 절어 닳고 단 나무 노가
녹물처럼 뿌연 적갈색 강물을 가른다.
늙은 여자의 머리 덮개에 붙은 금 장식이 배의
흔들림에 호응하듯 쩔럭인다.

배에 탄 이들의 코로 드나드는 동풍.
지금, 새벽인지 밤인지 잠시 헷갈린다.

어느 때인들?
우리는 도착하길 바라는 동시에 누구도
도착하길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 지나가듯 뱉은 농담의 속뜻.

농담도 외투를 걸치기에
적합한 날씨였기 때문이었을까.

고기를 씹다가 금으로 된 화살촉이 섞여 나왔다는
고사가 생각났다.

단언을 피하려고, 결정을 미루려고 노력한다.

뒤로 갈 수록 좋은 것이 있다면. 배는 뒤로 가는 법이 없고. 방향을 돌리면 그쪽이 앞. 목 꺾인 채 전진한다. 돌진. 단언하는것이 아니다. 경험한 것일 뿐이다. 느꼈다. 뭘?

마중 온 뭍 사람이 오른손을 올려 흔들었다.
펄럭이는 검은 천 위로 밝게 빛나는 흰 손목 위 흰 손바닥.
환영처럼 느껴져 불쾌했다.
손바닥 뒤집히고,
뒤집힌 손등이 살랑거렸다.

생크림처럼 얄밉게 출렁이며,
강물의 손가락들이 배를 뭍으로 밀었다.

멀리 보이는 천막 아래,
뚜껑이 반만 열린 관이 눈에 띄었다.

누운 것은 내가 잘 아는 얼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내렸다.

정박지에 배 묶어 두고.

벌써 우는 얼굴과
아직 울지 않은 얼굴이
섞여 있었다.

“영영 울지 않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영영 울지 않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오랜 수형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거미

임종을 보지 않고
죽기 직전의 사람을 조각배에 띄워보내는 관습을 가진 사회가 있다. 그렇게 배에 누웠다. 지난 날을 반추하는 것은 잠시. 문득 두려워졌고. 금세 사라지지 않았다. 옆에 함께 누웠다. 뱃바닥 밑. 느껴지는 물살. 속도와 결. 그것의 언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 시간. 발설하지 않으면 영원한 비밀. 비밀로. 남을 것. 배에서 다시 내리더라도. 맹세한다. 약속한다. 나와. 또 내 옆 그와. “말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을 거야.” 퍼트릴 수 있는 유일한. 말? 말. 기꺼이 수용. 비밀이 존재. 그 말이넓게 퍼지는 건 중요. 중요하지. 밤. 밤이 되면 더욱. 비좁은 배 안. 북적였다. 북적였다. 여럿으로 늘어난 것. 내 옆 뿐 아니라. 머리 위. 발 아래. 다리 새. 눈 앞. 모든 틈에. 제 살을 끼워 넣고. 길고 빠른 말. 얇고 가느다란. 사방에서. 지껄였다. 유쾌한듯. 지줄대는. 합창. 합창 아닌 합창. 그새 검어진. 강. 하늘. 물방울. 별. 빼곡하다. 곱절. 곱절의 목소리. 두렵다고. 무섭다고. 감기고. 감긴다. 별-은하, 강-바다. 바다-대양. 은하-은하단. -초은하단. -超超... -超超超... -超超超超超... 변한다. 계절은. 우주는 계속. 팽창. 팽창. 습기. 습기와 무한. 무한한 무한. 둘의 농도. 농도 차. 움직인다. 느리게. 살결을. 문지른다. 문지르며. 지나간다. 늙는다. 늙는다. 빠르게. 이른듯.
새로운 건 없었다.
전부 알던 것들이 무서웠다.

빈 자릴 응시하는 빈 눈.
빈 눈을 응시하는 빈 자리.

기회주의자들아, 안녕.
들뜨던 우리들.

이틀 간 쓴 3부작

1.

나는 선원.

여러 나라와 도시를 다니며
주민들에게 꼭 그곳에서만 나는 식물의 씨앗을 받는다.
내 방 화분에 심는다.
내가 아는 방식으로 열심히 키운다.
어떤 것은 잘 자라고, 어떤 것은 자라나는 데 실패한다.
어느 쪽이건 내 예상 밖이다.
잘 자란 것 역시 대개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식물과 열매들이 과연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자라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과연 애초에 부여받은 만큼의 성장을 이룬 것일까?
30cm만큼 클 수 있었던 게 나로 인해 반 밖에 크지 못한 것은 아닐까?
씨앗을 받은 곳으로 언제 되돌아 갈지 모른다.
또 어디서 받았는지도 제대로 기록해 놓지도 않았다.
궁금하지만, 또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영원히 비밀로
남는 비밀이 있을까.
기억이 영원하다면,
불가능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죽음이 곧 끝인가.
흔적 없는 완전한 소멸은 가능한가.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싶다.

3. 자신의 목걸이를 직접 만드는 여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중요한 것들만 목걸이에 끼웠다. 이를테면 추억이 서려 있는 것들. 여행지에서 주운, 그 지역에서만 나오는 광물의 조각, 2차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가져온 적군과 아군의 탄피, 돌아가신 할머니의 결혼반지와 어금니 같은 것들. 그러다 이미 끼워진 것들의 조합에 추가해도 좋을 만한 것들, 어울리며 그럴듯해 보일 만한 것들을 끼우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이미 구멍이 뚫려 있는 것들을 선호했다. 그러다 구멍이 없는 것들, 잘 뚫리지 않는 것들도 끼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다.” 막연한 믿음을 갖고 결국 뚫는 방법을 찾아냈다. 뚫고 끼웠다. 간혹 끼우고 싶은 것을 뚫는 것이 아니라 뚫고 싶은 것을 끼우기도 했다. 그러나 만질 수 없거나 볼 수 없는 것은 단 하나도 끼우지 않았다. 슬픔, 그의 이름의 이니셜, 8월 25일의 기억 등등. 철저히 만지고 볼 수 있는 것들만이 끼워져 있었다. 끼워진 동기는 모두 달랐다. 하지만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 있었다. 끈은 하나 더 있었고 그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라는 일관성. 또 다른 끈의 이름이었다.

바다에서, 어부의 한 순간

새벽 6시 경이었다.
어부가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것은.
파도가 거칠게 솟았고
물 위에 뜬 배는 휜 빗면에 맞춰 함께 솟았다.
그때였다.
그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시간은 절대 정지되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인 것도
사실이었다.
파도의 모양.
케이크의 옆면.
함께 긴 빵칼을 잡고
케이크를 위에서부터 자르던 손들.
케이크 위를 장식한 남자와 여자.
나는 결혼 당사자도 아니고 그 가족도 아니었다.
결혼식을 싫어하는 사람일 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만 했다.
장례식에만 참석하고 싶다, 싶었다.
모두가 기쁘거나 기쁜 척 하는 곳에
나까지 추가될 필요는 없다.
나는 기쁨에 꼭 필요한 재료가 아니다.
앞으로도 아닐 것이고, 그 역할을 떠맡을 생각도 없다.
내가 없더라도 기쁨은 기쁨이다.
축의금을 보탤 순 있다.
그러나
슬픔에는 내 몫이 있다.
장례에는 꼭 참석하려 한다.
그곳에서 나는 빛이자 소금이다. 될 수 있다.
유일하진 않을 테지만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추가분이 될 수 있다.
마치 줄다리기 할 때 한 쪽 편에 한 사람을 더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듯 내가
그곳에 있다면
그곳에 고인 슬픔을
마치 물이 끓어 증기가 되듯
공중으로 증발시켜 흩어지게 하는데
분명 기여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을 믿는다.
그날만을 기다리며.
내 장례에 오는 사람들에게도 미리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들은
뒤집힌 배의 내부까지도 들어와 밝혀주는 빛 같은 존재들. 그 빛은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꺾여들어올 것이고 자연에서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 거짓이거나 조작이 아니라면
기적이거나 불가사의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감사함이 담겨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내 감사가
아직 일면식도 없는 미래의 조문객들에게 전달될 리는 없을 것이다. 상관 없다.
심해의 눈먼 물고기 여럿이 함께 부는 휘파람의 멜로디처럼
당신들은 여러 들리지 않는 소리 속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란다. 언제나.

파도의 모양이 바뀌고
솟았던 곳이 주저앉고 주저앉았던 곳이 솟았다.
어부는 그물을 걷었고 여러 마리의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종류는 같았지만 모두 조금씩 다르게 생겼다.

유람선 난간을 붙잡은 두 사람의 대화

W: 오른손에 쟁반을 받친 남자
C: 의자에 앉아 신문 보는 여자

겨울.

W: 빈 잔 치워 드릴까요?

C: 원한다면요.
W:냅킨에 글씨를 쓰시네요.
C: 글씨가 아니에요.
W: 신문을 베껴 적으시는군요.
C: ...
W: 뭘 쓰시나요?
C: 시를 지어요.
W: 시는 어떻게 짓는 건가요?
C: 뭐든 한 가지를 가져와요. 또 한 가지 더. 둘을 붙여 보아요. 유사성을 찾아요. 차이가 아니에요. 유사성! 유사성! 유사성을 찾았다면 한 가지 더 추가하죠. 그건 처음 붙은 두 개가 좀 더 어울리도록 매만져 줄 거예요.
W: 마사지처럼요?
C: 마사지에요. 둘 다 긴장을 풀 테니까. 도공이 물레를 돌리며 만진 흙처럼.
W:힘을 줬다 뺐다?
C: 그렇죠.
세고 부드럽게.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게. 숨기거나 툭 불거지게.
W: 재밌네요. 지루하지 않아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부드럽답니다.
C: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말엔 흐름이 있어요. 흐름엔 높낮이가 있지요. 폭이 크지 않더라도요. 음악처럼.
W: 파도가 거칠어지네요.
C: 잔잔해지기도 하죠.
W: 파도의 어느 한 시점은 기와지붕을 닮았어요.
C: 곧 매끈해지죠.
W: 매끈해질까요? 빈 잔을 가져 갈게요.
C: 스푼은 두고요.

커피잔을 치우며 퇴장하는 W.
C는 냅킨에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파도가 조금 크게 출렁인다.
기와지붕.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들.
비가 오래 쏟아지자 남자와 여자가 함께 겉옷을 머리 위에 덮고 뛴다.
비가 더 거세진다.
뛸수록 더 타이트하게 좁혀지는 두 몸의 거리.
뛰는 속도는 평지일 때 빠르다.
오르막과 울퉁불퉁한 길에선 느리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흙과 비의 비율에 따라 발바닥이 들어가는 깊이도 다르다. 깊이에 따라 속도도 다르다.
비와 흙, 미리 있던 단단한 돌.
크고 작은 돌. 둥글고 모난 돌. 솟은 지반과 움푹 팬 계곡.
계곡이 컴퍼스처럼 360도 회전하면 분지가 된다.
둘은 어디로 뛰어가는지 모른다.
오르락 내리락. 좌우로 흔들.
뛴다.
멈추면 그곳이 집이다.
임시거처다.
그곳에서 이전에 없던 뭔가 생겼다.
아직 그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아무도.
이름 없는 것은 이름을 얻고 밝은 곳에 드러날 것이다.(그것 자체가 밝다는 것과 다르다.)
일찍 혹은 늦게.
혹은 적절히, 때에 맞게.

(맹인 안마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파도

그는 내 바지가 맘에 들지 않았고, 나는 그가 항상 약속 시간보다 늦게 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내 복장을 에둘러 지적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고, 나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나는 그와의 약속에 말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전화나 문자로도 내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에게 물을 순 없었다. 그래서 기도했다. 응답이 들렸다; “그는 네게 전혀 관심이 없어.” 나는 매일 그를 생각했다.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보이는 것마다 그의 모습으로 변했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내 의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상상 속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기로 결정했다. 내게 관심 없는 사람에게 절대 말을 걸지 않았다. 피할 뿐이었다. 기억 속에서도 거리가 멀어질 것이라 믿었다. 언젠가는. 온전한 형체를 잃고 소멸하리라. 그러나 지금은 아직이다. 아직 거리가 멀어지기 전이다. 아직 소멸하기 전이다. 나는 기다리는 중이다. 늦게 오는 것을. 이번엔 어떤 약속도 없었다.

아! 연결

시대를 타지 않는,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을 연구하는 건 좋은 일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그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연구를 다른 이에게 전달할 때 다른 문제가 생긴다. 네 말을 듣는 이는 너와 성격도, 이해력도, 쓰는 말도 모두 다르다. 무언가 변화했고, 변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전달은 어렵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 뿐이다.” 이 말이 놓이는 위치도 언제나 바뀐다. 그곳은 언제나 사이이다. A와 B의 사이. 수많은 소음이 그 사이에 개입한다. A와 B가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 그이전에 이미 제각각 삐뚤빼뚤했던. 전부 다른 자물쇠들. 입구의 모양, 뻗친 각도와 횟수, 끝이 모두 다른 한 묶음의 열쇠 꾸러미. 무수히 명멸하는 선실들. 실내와 벽, 복도.

스무 고개

매니큐어를 발라야 하는 곳은
모두 스무 곳이다.
왼쪽과 오른쪽과
손과 발의
엄지와 검지, 중지와 약지, 새끼.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희던 것들이 빨갛게 물드는 것은.
배 위에서라면
가끔
폭풍우를 만나기도 한다.
해일을 만나기도 한다.
아래서 파도가 맹렬히 철벅이고,
위에서 기관총 같은 비 우두두 쏟아지기도.
전후, 좌우로
배가 흔들린다.
그 위에서 매니큐어를 바른다면?
꼭 그래야 했겠냐마는,
꼭 그래야 했더라면?
쉽지 않은 도전일 테다.
곧 죽을 지 모르는데도,
이유 모를 이유로
기약해야 할 미래를 위해,
한 사람이 매니큐어 붓을 꺼내잡고,
손과 발을 부여 잡은 풍경이 있다.
빈 공간을 에워싼 벽들에 가려진 그곳에
한 사람이
아무도 보지 못할 싸움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이
박살나고 으깨지는 가운데.

뼈와 살로 에워싼 속 역시 가려져 있다.
비밀.
가끔 출렁이고,
가끔 고요하다.

안과 밖

맞지 않는 열쇠와 열쇳구멍처럼
세상에 자신을 맞추려다 실패한 사람들은
거리가 얼마이건 개의치 않고
먼 거리를 걸어 배를 타러 왔다.

배 위에서
계획 없이 터져나온 것들과
의도적으로 쥐어짠 것들이 섞여
말의 물결을 이루었다.

물결은 여러 방향으로 겹치고 겹쳤다.

피신 온 곳에서 피했던 것들을 다시 만났다.
아무도 자기만의 침실을 가질 수 없었다.

모든 문이 잠겨 있었다.

배의
안과 밖이 다르지 않았다.
눈에 비친 바다는 바다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몸을 누일 자리를 찾던 이들은
대신 말을 그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키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검은색 챙 넓은 모자 I 나무 보트

집으로부터 12km 떨어진 강까지
그는 맨발로 걸어 왔다. 조그만 나무 보트를 타기로 했다. 입고 있던 나머지 옷까지 다 벗었다. 검은색 챙 넓은 모자 하나만 남기고. 나체와 보트와 모자. 노 젓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소리와 몸 사이 한 꺼풀이라도 더 벗고 싶었다. 챙 넓은 모자는?

오래된 생각들. 30년 전 쯤, 죽은 쥐 두 마리를 봤다. 개들에게 물려 죽었다. 한 마리는 당시에도 여전히 개의 입에 물려 있었다. 누운 것과 죽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죽은 것이 좀 더 연하고 부드럽다, 고나 할까. 축— 늘어졌으니. 챙 넓은 모자는?

집에 가는 길. 집 정원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개울을 봤다. 비가 많이 온 날이었고. 길쭉한 몸의 수달이 헤엄치는 모습을 봤다. 비에 맞아 푹 젖어 있었다. 항상 젖어 있었을 테지. 맵시 있게 젖은 길쭉한 것. 수달의 것은 더욱 나체처럼 보였다. 캉캉짖는 작은 치와와처럼 꼬까옷 빼입은 수달을 본 일 없지. 유유히 흘러가고. 소실점에 가까워지다 사라졌다. 사라졌다, 그래서?

흰 빛은 전기. 번개를 모아 전기를 쓰는 줄 알았던 시절이 있다. 천둥이 칠 때마다 뛸듯 기뻤다. 발전소의 존재를 알았을때 적잖이 실망한 건 그 때문이다. 오늘 아침 산타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기어가듯 엎드려 속으로 울었다. 검은색 챙 넓은모자는 번개와 나 사이를 차단한다. 내 머리를 뚫지 못한다. 지날 뿐. 물은 보트 밑을 흐를 뿐, 내 밑을 적시지 않는다. 보트가 날 보호한다. 익사와 피라냐로부터.
소리가 듣고 싶었다. 아내는 날 이해할까?
곧 죽을 내 몸은 아내가 준 선물을 기념하길 원한다.

마지막 감사인사가 쉽지 않다.

노를 젓는다. 물살을 가른다. 그 소리를 듣는다.

말라붙은 소금

풍덩!
소리를 듣고
벗어놓은 신발과 흰 물거품을 보고
신발 옆에 함께 놓인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모두가 동시대적인 것에 골몰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 내 관심은 온통 다른 데 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 결국 죽는다는것. 누군가는 동시대적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권유할 테지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죽음이 공유하는 것을 알기 원한다. 허무일까? 아니기를.
내 관심은 내 선택의 영역 밖에 있다. 차라리 관심이 날 선택하고, 비좁고 유일한 길을 허락한다. 그 길을 걷거나 거부하거나, 양자택일. 거부한다면 내 삶은 급히 시들어 가는 꽃 같을 것이다. 내 눈은 빛을 잃고, 피부에는 피가 돌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시들을 남기고 싶었다. 비 갠 뒤 생글거리는 팬지처럼 피어난 것들을.

그의 방에서
물에 젖었던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다.

번진 글씨 위,
말라붙은 소금.

늦가을 이른 아침

갑판 위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쇠구슬들이 쏟아져 내렸다. 각기 다른 높이로 튀어오른 것들. 납빛 점들을 연결해 그린 곡선이 가슴속에 각진 파도를 그렸다. 구불거리던 것들이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직선 여럿을 따로 그리며 각각의 바닥을 굴렀다. 쪼그려 앉아 좁은 보폭으로 걸으며 하나하나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불룩해진 주머니만큼
가슴 속은 불룩해지지 않았다.

걸었다. 내 방으로. 주머니 속 구슬들이 서로 까슬거리는 소리. 거슬렸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구슬픈 멜로디의흘러간 유행가. 노래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그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곧 중단되겠지, 생각했다.

꿈에서 깼다. 소스라치듯 일어났다. 주머니를 뒤져 구슬의 갯수를 세었다. 하나 모자랐다. 갑판 위를 구르던 구슬들의 모습. 곧장 뛰어나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다 단념했다. 쫓는 것을 그만 두자고 결심했기 때문에. 나간 것 대신 들어온 것을환영하자, 그랬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남은 구슬들을 만졌다. 모두 움켜쥐었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리기도 해보았다. 나는 아직 여기까지, 라는 생각을 했다. 말과 글로는 그 다음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쇠구슬의 촉감을 맛보고 싶었다. 입에넣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맛봤다. 충분히 맛봤다. 혀 대신 손으로 핥았다. 소리를 보았다. 구르는 모습을 들었다.

라디오.

라디오가 궁금했다. 벽은 조용했다. 뚫고 들어온 것이 없었다. 문을 열기 전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생각.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기로 했다.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까지.

꿈에서 깼다. 구슬의 갯수. 모자르지 않았다. 주머니가 없었다.

꿈에서 깨지 않았다. 배 타는 것이 즐거웠다. 꿈에서 깼다. 즐거울 것도 없었다. 없었다.

물 위, 불 탄 배에 탄

나무배에 불 붙었다.
불은 위를 향하고
물은 옆으로 흐른다.
가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쏟아진다.
거의 아래에서 위로 흐르지 않는다.
나무배는 활활 잘 탄다.
배에 탄 사람들은 불에도 탄다.
불에 탄 사람들은 위로 올라간다.
가끔.
거의 없는 일이지만.
모든 일은 가끔이고.
항상 일어나는 건 환상이고.
환상은 활활 위로 잘 오르고
가끔 밑으로 푹 꺼진다.
밑으로 푹 꺼진 것에 젖어 사는 사람들.
가장 무서운 건 그들이다.
그들의 말이 밑으로,
밑으로 흐르고.
사실 위에다 부르는 찬송이다.
아무리 불러도 승천하는 나무배 내려주지 않아도,
아무리 불러도 붕 뜬 것은 황폐한 정신, 마음, 영혼, 에테르, 발 없는 귀신 따위.
가끔 모여서 서로의 믿음 검증하고
거의 그것에 희망 품지 않는다.
배를 타고 승천한 것은 선지자 엘리야 뿐이라고
신을 믿지 않는 그들은 굳게 믿는다.
책에 파묻힌 목 위 얼굴이 물 위로 흘러 간다.
결국은 죽음이다.
가끔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는 생각이 바꾸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훌륭하지만.
오직 그뿐이다.
불은 위로. 물은 옆으로. 사람 눕고. 스르르.

비 온다.

오후의 넷

뱃놀이.

해를 등진 남자는
작은 캠핑용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본다.
책은 왼손으로 잡고 오른 손가락으로 넘긴다.
밝게 빛나는 종이 위에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햇빛에 반사된 흑연이 은빛의 굵은 실처럼 보인다.
물결이 잔잔하여 밑줄을 긋는 게 어렵지 않다.
마주 선 여자가 정면으로 햇빛을 맞으며 손차양을 만든다.
미간을 찌푸리고 남자에게 이야기한다.
입술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 얘기하다
입을 양쪽으로 활짝 벌려 미소짓는다.
흰 니가 아코디언처럼 펼쳐진다.
남자와 눈을 맞추지는 않는다.
미간도 그대로.
“찌푸린 미간+활짝 핀 미소=?”
해는 무한한 길이를 가진 상아색 막대와 같은 빛을 멀리서부터 힘들이지 않고 보낸다.
빛이 남자의 등에 부딪쳐 만든 그림자는 길다.
길지만 여자의 눈부심을 막을 만큼 긴 건 아니다.
여자가 말을 그치고 손차양을 내린다.
남자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갸우뚱한다.
긍정 혹은 부정.
혹은 그 사이 어디 쯤, 불명확.
대화가 멈춘 사이 여자는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이따금 책장을 넘기는 소리,
연필로 밑줄을 긋는 소리, 등등,
소리가 완전히 멈춘 때는 없다.
또한 그들은 물 위에 떠 있었다.
흐르는 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소리를 만들고,
그것은 매순간 다르게 반짝이고,
매순간 어떤 것을 띄우거나 가라앉힌다.
흘려보낸다.
배를 처음 만든 사람은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이제 다 됐다, 생각했을 것이다.
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는 궁극적 방법을 알아냈다는 기쁨으로 매우 들떴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그러나 잠시 그랬을 것이다.
잠시는;
사그라든다. 녹는다. 끝이 있고, 온데 간데 없게 된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듯.
처음과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는듯.
이미 넘어간 책장의 밑줄.

어느 오후에 밑줄을 그었다.
잠시 곁에 머물렀다.
누군가는 밑줄 그은 문장들을 모아 새 공책에 옮겨적을 것이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아라. 그것이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내게는 일/휴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더 밀접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내 일을 통해 사물들을 두렵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코로의 말:
애써 찾으려고 하지 마라. 기다려야 한다.”

모뉴먼트

시계.

11:28

보트가 지나간다

11:57

요트가 지나간다

13:09

바나나 보트가 지나간다

13:44

유람선

15:03

砲 없는 모든 배들

16:29

조정

17:00

카누와 카약

17:11

흰 돛과 파란 돛

19:23

방파제~날름거리는 파도

20:02

결코 평화롭지 않다

23:21

등대 불이 켜지고 빛이 밤을 가위처럼 오린다

원한다면

비 오고 눈 온 자리는 같다. 7월의 햇빛이 바싹 말린 자리도 마찬가지. 나는 그곳에 앉았다. 비에 젖은 나도 눈이 쌓인 나도 같다. 석탄처럼 검게 익은 나도. 나는 일어섰다. 나는 배에 탔다. 배는 아래로 물을 막는다. 위로는 비를 맞는다. 눈도 맞는다. 바늘 같이 날카로운 햇빛. 같은 배라는 걸 또 한 번 강조할 필요는 없을 테다. 나는 선실로 들어간다. 선실은 위로 물을 막는다. 언 물과 얼지 않은 물. 둘. 햇빛을 막는다. 날카로운 것을 튕겨낸다. 나는 젖지도, 검게 익지도 않는다. 비로소. 이제 됐다, 생각한다. 나는 불안하다. 갑자기. (갑작스럽지 않다, 언제나.) 나는 밖으로 나간다. 위로 물과 빛을 맞는다. 아래는 여전하다. 미래의 불안을 실험한다. 내 몸을 가지고. 아래가 파괴될 시간을 미리 경험한다. 불안이 공포로 바뀐다. 명확하니까. 예방 주사처럼 접종한다, 공포를. 당겨진 내일. 나는 뒤집힌 배의 아래를 산다. 어제 위였던 곳. 전부 젖었다. 나는 배를 머리에 이고 만족한다. 바늘 같은 빛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했다. 원한다면 바싹 마를 테지만. 원한다면 위아래로 젖을테지만. 검은 젖은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전부다. 전부는 앉고 선다. 안과 밖을 드나든다. 원한다면.

사이다를 마시는 바람에

마치
지구 반대편
나비의 조그만 날개짓이
거대한 토네이도를 만들듯
갑판 위 쪼그려 앉아
사이다 각 일 병씩을 들이킨 남자 두서넛이
뱉은 트림은
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ㅓ어어어어어ㅓㅓ어어어어어억
하고 배 위의
부피와 질량 가진 온갖 것을 뒤흔들고
밖으로까지 뻗쳐나가
퐁퐁 터지며
뽀글뽀글거리는 방울진 거품들을
잔잔했던 수면 위로
전염병처럼
퍼뜨렸다.
뱃속 탄산이
꼭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사람처럼 입을 열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일은
누구도
듣지도
보지도 못 했다.
어쨌거나
바다는 누군가의 위장 속
출렁이는
탄산 가득한
사이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법이 없었고,
누군가는 곧 트림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고,
누군가의 옆에 앉은 동료 두서넛이
함께 사이다를 마시지 않았음을
100% 확언할 수 없었기에,
그들 모두가 합창하듯
거대한 트림을
동시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처럼
푸슝 발사한다면,
못해도
토네이도의 1억 배는 훌쩍 뛰어넘고도 남을
전인미답, 미증유의 규모를 지닌
편지풍파가

벼락치듯
우리 모두에게
안온한 삶을 영위하던 각각의 가정에
들이치지 않으리라는
기우를
멈추는 것은
아무래도

요원한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
.

잠자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걸터앉은 선실 침대.

누워 자는 사람의 얼굴을 그의 턱 밑에서부터 쳐다보면 그의 두 콧구멍이 맨 처음 연상시키는 게 왕복 터널이라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왕복 터널을 들어갔다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이 크게 달라졌거나(사실 망가졌거나), 혹은 전혀 불길함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산책하듯 가벼운 기분으로 들어갔다 영영 다시 이전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어느 젊은 여자에 대해 상상해 본다면, 누워 자는 사람의 턱이 그의 목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곡선이 꽤나 아찔하고 섬뜩하게 느껴진다. 정신적인 의미와 공간적 의미, 둘 모두에서 영영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을 삶은, 내게 그 이미지가 가진 해상도와 색의 채도와 결부돼 연상된다. 그리 높지도, 아주 낮지도 않은 480p 정도의 해상도. 채도는 꽤 낮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때의 빨강은 신선함과는 거리가 먼 빨강일 것이다. 젊은 여자는 그 빨강의, 시들어가는 꽃잎의 색을 가진 기모노 한 장을 두른 채 그 터널을 나오는 중일텐데, 모자이크처럼 크고 작은 사각형으로 이뤄진 그의 피부와 머리칼은 겉보기엔 전혀 건강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멀쩡해 보이지만 눈은 빛을 잃은 것이 확실하다. 눈이 마음의 창이란 건 그저 문학적 표현이아닌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두운 터널 너머에서. 여자의 과거는 그곳을 방금 막 지나온, 오직 그만 알고 있는, 즉 우리는 알 수 없는 터널 속 어둠을 닮았다. 어떤 질문도 불가하다. 단지 상상 속에 사는 인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빛을 잃은 눈을 뜬 사람에게는, 그 동기가 무엇이든, 어느 질문이라도 날카롭고 뾰족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알고서도 상처를 낼 필요는 없겠지.
걸음걸이를 본다. 그는 걷고 있지만 자신에게 다리가 있고, 그것이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움직인다는 매순간의 감각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걷고 있다. 왜냐면 그의 마음이 지금 걷는 그곳에 없기 때문에. 먼곳 어딘가로 떠나 있기 때문에. 터널에 들어가기 전과 들어가서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의 기억에, 그리고 멈출 수 없는 그 둘 간의 비교에 둘러싸여 일평생 겪은 적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중이다. 잘못 들어간 동굴 속 박쥐떼들처럼 기억은 아무런 악의도 없이 그를 소스라치게 한다. 즉시 그를 도와줄 방법은 없다. 이미 꽤 시간이 흐른 뒤 팔이 잘린 사람에게 제 팔을 찾아 다시 달아줄 수 없듯, 기껏해야 가진 여건 하에서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성능 좋은 의수 밖에 달아줄 수 없듯 그는 어떤 식으로든 터널에 들어가기 이전으로는 완벽히 돌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진난만한 걸음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절벽 밑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 거리낌도 없이 투신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이게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의수를 맞추는 일은 두번째고. 자던 사람이 흐리게 눈을 떴다. 좁고 어두운 창문 너머.

1863년 4월 26일

배에 다시 승선하기 직전, 편지와 함께 상자를 받았다.갈색 노끈으로 단단히 묶인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상자였다. 배가 출항하자 부푼 마음으로 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냈다.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당신에게 드리는 두 번째 선물이자 마지막 선물입니다. 마지막 선물인 이유는 당신에게 적잖이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당혹스러우실 테지요. 뜻밖일 겁니다. 제가 당신의 인생에 들어갔던 적도 단 한 번도 없을 테니. 잘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선물을 드렸을 때 당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신은 그들 외부에 속한 사람이었고 다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르르 몰려 다니는 소떼를 바라보는 외로운 늑대였죠.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모습이 예뻐 보였고 첫 번째 선물을 대가 없이 드렸습니다.
첫 실망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떼들이 자신들과 다른 말을 하는 당신을 찾아와 따져 물을 때 당신은 본인의 주장을 지키는 대신, 무례했다며 그들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때 당신의 왜소한 배짱이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당신은 외롭게 고개를 쳐든 늑대처럼 제 할 말을 멈추지 않았죠. 잔뜩 주눅이 들어 사유의 두께에 비해 꽤나 무거운 고급 어휘들로 언어를 치장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대신 빙빙 돌고, 배배 꼬아 말했지요. 사실 실망은 내잘못입니다. 이미 이때 당신에게서 내 모든 기대를 거둬야 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지킬 만한 용기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타고난 그릇이 그랬던 게죠. 내 안목이 큰 오류를 저질렀음을 진작부터 인정하고 반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 했죠. 여전히 나와 그다지 특별한 관계도 없는 당신에게 모종의 기대를 걸었습니다. 잘못된 말에 헛된 희망을 걸고 배팅을 멈추지 않는 멍청한 경마꾼처럼요.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삶의 맨 밑을 본 후에야 진실의 맨얼굴을 볼수 있는 자들이죠.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모든 기대를 거두기로 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내가 외로운 늑대로 착각했던 당신은 어느 새 소떼들에게 아부하고 있더군요. 그들의 언어로요. 원래 가졌던 언어의 흔적이 지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편이 더 애처로웠죠. 당신은 그 전까지 내던 목소리와 언어를 그들 사이에 끼우고자 열렬히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외로운 늑대지만,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두 내 탓입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와 굳이 드리지 않아도 되는 두 번째 선물을 보내는 것은 모두 나를 위해서입니다. 반성문입니다. 실망의대상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내 심약함이 빚은 환상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잘못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내 두 눈에 대한 처절한 규탄입니다. 그래서 내부 문제를 외부 의존으로 해결하려 한 잘못된 문제 해결 방식의 적용에 대해 오류 보고서를 남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물은 일전에 약속한 것이기에 드립니다. 당신에게 그 약속이 어느 정도의 무게였는지 나는알 수 지만, 내게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꼭 필요할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내가 드리지 않았더라도 당신이 직접구입했을 테지요. 내게 중요했던 건 내 약속을 스스로 어기지 않는 것입니다. 나쁜 습관이 내 안에 뿌리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뱉은 것이 빈 말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가벼운 것들에 내 몸 마저 포함되는 것이 죽기보다 싫습니다. 당신은 내가 만든 환영일 뿐입니다. 지금은 아니란 걸 압니다. 내가 못 봤던 당신이 드러났죠. 그러나 나의 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진실일까요? 정말 환영이 아닐까요? 나의 실망이 다시 기대로 바뀔 계기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걸까요? 나는 몹시도 궁금합니다.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배에 함께 타진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하지만 나는 알게 될 것입니다.
편지는 이렇게 끝났다. 배 안에는 내가 오래 알던 사람들 뿐이었다. 나는 모든 틈과 어두운 곳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이상한 행동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용히 다녔다. 내가 모르던 것은 없었다. 전부 아는 것이었다. 배 밖은 바다였고. 역시 그대로였다. 내게 새로운 것은 편지와 상자 뿐이었다. 상자는 열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편지는

검은 비

흰 배 위로
검은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질 때
이름이라도 적는 줄 알았는데
비가 거세지자
이미 있던 지상의 이름들마저
모두 지우는 것 같았다. 지옥으로
모든 이름들 잡아끄는 사람 여럿 죽은
늪의 양손처럼
조용히
터지는 방울 몇 개만을 다잉메세지로 남겨주는
비.
바닥에 닿으며 검게 터지는
물방울들. 폭탄처럼. 팡팡.
빗방울 타고 낙하하는
초점 잃은 눈을 가진 공수부대원들.
전부 거짓말.
저급한 상상력이지만 몹시도
적합한 까닭은 그것이 세상에서 삭제하려는 것이
‘의미’이기 때문이다.
수십년 멈춰있던 휴화산이 재점화되듯
부글부글
흰 배를 띄운 검은 물 위로 떨어지는 검은
빗방울들 펄펄 끓고.
신원미상자의 지문 같은 동심원 여기저기 그리며
얇게 퍼지다가
이내 고요히
그린 과녁 삼키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매끈한 표면을 유지한다.
물 위의 글씨가
헛수고의 비유로 사용된 것은 몹시도 오래된
역사를 지닌다.
여기 하나 더 추가한다:
역사의 헛수고를.
10만년, 100만년, 10억년, 1000억년 뒤의
미래가 확실히 예정돼 있다. 그때
역사는 남아 있을까?
이 모든 것의 의미는?
이 모든 것은?
의미는?
잔뜩 쌓인 것들이 잔뜩 쌓인 것들을
무수히
무수히
무수히
반복하고도 허무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A: 흰 배가 남았다.
Q: 여전히 희어?

누가 이 모든 걸 죄다 기억하고 붙잡을까

많은 사람들이 배나 뗏목으로 건너는 폭이 넓은 강을
어떤 사람은
좁고 가느다란 나뭇잎 하나에
단지 엄지 발가락 한 쪽 정도 겨우 얹고
반대편 다리는 접은 채
건너기도 한다.

계층에 관한 우화나
그에 결부된 울분에 관한 은유가 아니다.

아직 땅이 부족하다.
물,
물 뿐이다.

현실.

드물게 존재하고
드물어서 고귀한 신비이고
이때 신비를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불러도 좋을까?

영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강폭에 끝과 시작이 있다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배와 작은 잎 모두
강을 건너면 두고 가야 한다.
이파리와 발바닥을 바느질해 묶어 놓았더라도.

불가능.

전혀 슬프지 않은 까닭은
그것의 뒷면이 앞서 말한대로 추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명되었다’고 하였다.)

물살을 가를 때 양 옆으로 흩뿌려지는
물 튀김은 발 옆에 매달린 날개처럼 희고 크다.

당장은 날 수 없지만
곧 날 것 같고.

신비는 쥐가 새끼를 치듯
매우 자주
근본을 모르게
또 다른 신비의 보증자를 자처한다.

현실의 폭이 한계를 모르고 늘어난다.

강을 건넌 사람은 주머니에 나뭇잎을 집어 넣었을까,
과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시계를 꺼내 보는 건 가능할 수도.

몇시야?
뭐?

(...)

뭐가?

시침과 분침은 강을 건너던 그의 두 다리처럼
한쪽은 짧고 한쪽은 길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분명하다,
그건.

암초

암초에 걸린 배 위에서
그는 암초를 앞에 둔 명상에 관한 시를 썼다.
노래 불렀다.
배에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배와는 무관한 삶을 여태 산 사람의 시점에서 부른 노래.

암초의 세부를 묘사하고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러다 철학적 통찰로 도약하고
지금 막 맞닥들인 위험 앞에 초연하고
초연한 체 하고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펼쳐지는
역사의 반복을 논설하고
지금-여기의 시공간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달관하고
달관 이상의 통달을 몸소 체현하고
허허 웃으며
오천살 먹은 노인인 체
또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인 체
현자의 말과 글 쭈뼛거리며 인용하고
외화된 지혜 더듬더듬 뱉으며
소탈하게
자기 부정의 연속을 연기하다가
차라리 탈 쓴 배우가 되어라,
스스로 되뇌이다가
다시 암초,
꺼칠하고 시커먼
암초로 돌아와

앞을 보고.

눈꺼풀 베지 못한 자신의 얕은 결기 책망하며
우주의 홍소를 제 한 몸으로 받아내듯
움직이고, 먹고, 말하고, 싸며, 모든 울타리 겅중겅중 뛰어 넘어,
발걸음 미치는 모든 길을 제 집으로, 배움의 터전으로, 밤하늘을 이불 삼아, 별들을 양식 삼아 허허허,
허허허허
허허허.

암초를 보고;

암초는 암초다.
암초는 암초가 아니다.
존재 자체로
선물이다,
스승이다,
스승은 무슨,
선물은 무슨.

암호 같은 말
주절주절 저 혼자 주고 받다가
제 발에 걸려 자빠지고
혀 담긴 입
뱀 든 바구니처럼
함정 되어 제 발 제가 빠뜨리더니
암초 앞에서
암초가 뱃바닥 구멍 뚫기 전에
바다 밑 어둔 곳에 끌어내리기 전에

스스로 파멸하리라.

가장 큰 죄,
스스로 속인 죄로.

이민 가는 배 위의 두 청년

양복 입은 두 청년이
사이에 램프 하나를 두고
앉아 있다.

어두운 실내에
둘의 얼굴을 밝히는 건
오직 램프 뿐이다.

둘 모두
잘 빗어 넘긴 머리에
반듯하게 다림질 된 긴 코트를
입고 있다.

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는데
어두운 실내 탓인지 실제 그랬던 건지
모르겠다.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둘은 이민을 가기 위해 배에 함께 탄
사촌 사이였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친지들의 이름과 그들에 얽힌 사연들이
쉬지 않고 오갔다.

가족들은 모두 본국에 남겨 두고
둘이서만 먼저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둘만 있던 방에
다른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조그만 에스프레소 잔 하나와 컵 받침을 들고
두 사촌이 앉은 나무 탁자에 합석했다.

셋은 한 동안 조용했다.

새로 들어온 남자가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는 소리와
문밖의 파도 소리,
배 안의 여러 기계 장치의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실내가 채워졌다.

침묵을 깬 것은 두 사촌 중
왼편에 앉은 이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남자가 어디라고 말했지만
둘 모두 처음 듣는 생소한 지명이라
잘 알아 듣지 못했다.

남자도 같은 질문을 했다.

오른편에 앉은 청년이 어디라고 답했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램프 불빛에 비친
서로의 얼굴과 표정, 그외의 사소한
몸짓들만을 주의 깊게 살피며 시간이 흘렀다.

에스프레소를 다 마신 남자가
먼저 일어선다는 말을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둘 역시 승낙의 의미로
두 눈을 부드럽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아래로 한 번 까딱거렸다.

남자가 나갔다.

남자가 나갔음에도
침묵은 이어졌고, 둘 사이에
왠지 모르게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른편에 앉은 사촌이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반복적으로 끄덕였고,

왼편에 앉은 사촌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코로만 날숨을 뱉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남자가 문밖으로 가져간 것은
언어였고
놓고 간 것은
침묵인 것 같았다.

두 사촌이
앞으로도 한참 걸려 도착할 곳은

외국인들이
외국어로 말하는
외국이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말로 전하는
나는
이후로도 둘 사이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냐고?

(일렁이는 얼굴들.)

램프다.*

*램프조차 아니다.

배 위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들

술 먹고 잠만 잤다.
긴 항해 끝에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커피를 마셨다.
옆 사람이 따라 마셨다.
둘이 마셨다.
셋이 마셨다.
셋이 넷 되고,
넷이 다섯 되고,
다섯, 여섯...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라떼를 마셨다.
콜드브루를 마셨다.
둘 둘 하나를 마셨다.
정신이 번쩍 났다.
두 눈이 벌개졌다.
두피가 뜨거워졌다.
관절이 욱신거렸다.
급기야
점프를 했다.
소리를 질렀다.
얼싸 안고 엥엥 울었다.
침 흘리며 칼칼 웃었다.
오늘은 내일의 그림자
어제는 오늘의 그림자
과거의 어둠은 어제
과거의 빛도 어제*
라고 노래 불렀다.
항해 중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도착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잠시 잊었다 다시 떠오르면
블랙을 마셨다.
잠들지 않기 위해.
꿈꾸지 않기 위해.
도착하지 않기 위해.
그 동안 도착하는 꿈을 매일 꾸었다.
이제 꿈 안 꾸고 육지에 도착할 것이다.

*Madvillain, Shadows of Tomorrow (feat. Quasimoto)

또 한 구의 시체를 둘둘 말았다

또 한 구의 시체를 둘둘 말았다. 구멍마다 솜을 채워넣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도. 다른 선원 한 명과 같이 들어 배 밖으로 던졌다. 흰 거품을 마지막 흔적으로 남겼다. 다시 잔잔해진 표면. 백지처럼. 또 한 구의 시체를 둘둘 말았다. 오랜만이었다. 알맹이가 빠져나간 빈 껍질. 내가 벗어놓은 옷과 뭐가 다른지. 잠시 생각했다. 다르지, 달라. 풍덩. 거품을 이루는 크고 작은 기포들. 퐁퐁 터져 없어진다. 하나도 빠짐 없이.
또 한 구의 시체를 둘둘 말았다. 속병을 오래 앓다 죽어 냄새가 지독했다. 긴 트림을 터뜨리며 다시 숨이 돌아올 것 같았다. 돌아오지 않았다. 감긴 눈만 자꾸 떠졌다. 손바닥으로 쓸어넘겨도 소용 없었다. 눈꺼풀의 어떤 의지. 계획돼 있던 걸까. 얼굴도 마저 덮었다. 다시 볼 일 없겠지. 거품 뭉치의 모양이 양쪽으로 길고 뾰족했다. 묘했다.
또 한 구의 시체를 둘둘 말았다. 벌써 나와 같이 시체 여럿을 둘둘 말아 던진 이의 몸이었다. 남의 몸을 번쩍번쩍 들던 오른팔과 왼팔이 이제 중력 하나 이기지 못한다. 털썩. 피가 돌지 않는 핏줄. 나는 둘둘 말기 전 봤던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 한 말을 여러 번 반복해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매일 아침 그렇게 하기로 다짐했다고 들었다. 풍덩.
또 한 구의 시체를 둘둘 말았다. 머리부터 말았다. 머리가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머리가 터져 죽었다. 터진 머리가 보기 싫어 흰 천으로 덮어 두었다. 항상 화려한 언변으로 치밀한 분석을 늘어놓던 입. 남들에게 즉시 관심 끌 만한 것을 냄새 맡던코. 그럼에도 멀리 내다보지 못하던 눈. 깜빡이던 눈꺼풀은 입 대신 ‘일희일비’라는 네 글자를 읊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머릿속에서 살다간 사람은 머리 밖 세상이 틈입해 온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터져 죽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터지지 못하도록 꽁꽁 싸맸다. 물고기들도 오늘은 굶어야 할 판이다. 그 편이 낫다고 직접 전해주고 싶었다.
또 한 구의 시체를 둘둘 말았다.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 피부가 더 희던 사람. 눈썹이 더 짙던 사람. 눈매가 더 날카롭던 사람. 코끝이 더 뭉툭하던 사람. 이마가 더 넓던 사람. 입술이 더 파랗던 사람. 머리숱이 더 적던 사람. 어깨가 더 말리고 등이더 굽은 사람. 손가락 마디가 더 굵던 사람. 귓볼이 더 통통하던 사람. 관절이 더 삐걱거리던 사람. 이름이 내게 남았다. 몸은 던졌고 거품을 기억했다.
배가 무너지는 것을 오래 전부터 느꼈다. 가라앉는 것과는 다르다. 무너지면 물 아닌 곳으로 간다. 흐르는 것도, 찰랑이는것도, 퐁퐁 터지는 것도 없다. 시커멓다. 하얗다. 시작이다. 끝이다. 알 수 없다. 이미 다 안다. 믿는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무너지는 것은 희뿌연 영혼과는 다른 단단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깊고 뜨거운 내부를 가진. 또 한 구의 시체를 둘둘 말았다. 나는 아니었다. 아직.

새 도시의 새 날

그 도시에 정박한 첫 밤, 배에 다른 존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어두웠다. 피부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았다. 차라리 모든 빛을 흡수했다. 암흑. 그들의 어둠에 못 미치는 말이었다.
선원 모두가 잠든 방에 그들이 들어갔다. 누운 몸들 옆에 함께 누웠다. 잠든 이들은 자는 중에도 알 수 있었다. 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옆에 있었고, 촉각으로 감지되었다. 그들은 단단한 실체였다. 살과 피를 가진. 물론 모두 어두운. 선원들이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새로 침입한 촉각이 빚어낸 형상을 꿈에서 보았다. 느꼈다. 사막의 모래, 불량배들의 구타, 미녀와 주고받는 촉감, 한 없이 쏟아지는 비... 빛 없는 것들이 의도 없이 건넨 목록이었다.
아침이 되었다. 선원들은 누운 몸을 일으켰다. 방 밖으로 나갔다. 빛을 쐬었다. 꿈이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도 그얘길 하진 않았다. 입 밖으로 터진 것은 빛의 트림 뿐이었다. 처음 본 도시에 대해 한 마디씩 말을 얹었다. 까끌거린다, 뱃속 내장이 전부 꼬인 듯 저릿하다, 이제까지 가본 어떤 곳보다 더 포근하고 부드럽다, 영원히 고독할 것만 같은 풍경이다...
전부 환한 도시 풍경 위로 쏟아낸 말이었다. 역시 도시의 의도와 무관했다. 도시는 말이 없었고, 빛 또한 그랬다. 도시는 꿈꾸지 않았고, 빛 또한 그랬다. 모든 건 암흑의 소행이었다. (암흑의 소행이 아니다.)

비뚤어진 지평선

지평선이 비뚤어졌다.
5도 쯤.
배가 비뚤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비뚤어진 것도.
내 눈이 비뚤어진 것 역시.
두 눈의 대칭은 그전부터 맞지 않았다.
커피를 마셔 보았다.
소용없었다.
배를 갈아타 보았다.
소용없었다.
북을 쳐 보았다.
소용없었다.
선장에게 당신도 그러냐 물어 보았다.
아니라 했다.
키를 돌려 보았다.
뱃머리만 돌아가고.
닻을 내려 보았다.
멈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빛에 비춰 보았다.
은은히 물결치는 윤슬과 그 끝,
어쨌거나
비뚤어진 지평선.
그 전에 지평선에 흡수되며 사라지던 태양과
석양을 본 것은 물론이다.
비뚤어졌어도 아름다웠지.
끝내주게.
끝내주게.
작은 보트로 갈아타 보았다.
시야만 내려왔을 뿐 마찬가지.
물구나무 서 보았다.
그래봤자.
노를 양쪽으로 저어 보았다.
양팔이 아프고.
한 팔로 저어 보았다.
한 팔만 아프고.
한쪽 눈을 감고 보았다.
반대 눈을 감아 보았다.
좌우로 왔다갔다
움직이는 지평선.
그대로.
거울에 비춰 보았다.
번쩍
섬광을 반사하며 좌우반전.
점점 다시
스스로
수평을 맞출 거라 막연히 기대해 보았다.
절절히 믿어 보았다.
손이 발 되게 빌어 보았다.
안달복달 끙끙거려 보았다.
바람은 바람일 뿐.
휘—
다른 바다,
다른 육지로 가보았다.
같은 눈, 같은 사람인 것을.
죽을 때까지 5도 쯤.
가끔 4도, 가끔 3도라고 희망 섞인 착각도 해보지만
콩깍지 금세 벗겨지고
죽을 때까지 5도 쯤 비뚤어진
지평선과.

간척지 위 걷기

간척지를 걸었다.
땅 밑에 짠 맛이 남았다고 한다.
파서 맛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바다였던 시절,
떠있었을 배를 생각했다.
다시 땅을 파고 물을 길어 배 띄우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 했다.
나는 무리한 일을 하지 않는다.
새 바다를 찾아야지,
걷는 동안 생각했다.
배도 띄웠다.
새 바다가 보일 때까지 걷기로 했다.
새 바다가 보일 때까지 생각하기로 했다.
결심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간혹 뚝뚝 끊어질 생각들
이지만 바다 역시 그렇다.
내가 갈 바다는 그런 모습이다.
받아 들인다.
간척지는 언젠가 바다가 될 지 모른다.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수위를 가질 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모습은 아닐 지 모른다.
그걸 믿는다.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
뚝뚝 끊겨도.

새 바다 위에 눕겠다, 나는.

노 없는 배

악어 사는 강.
악어 쳐내다 노를 뺏겼다. 폭이 넓은 강. 한복판. 손헤엄 치기 겁났다. 노 없는 배 위 몸. 내 몸. 강은 흐른다. 배 싣고. 강이그렸다 지우는 곡선 따라 이리저리. 떠간다. 땀 흘렸다. 비 오듯 줄줄. 바친 사람 없는데 바쳐진 제물 된 기분. 비나이다, 비나이다. 산 채로 내릴 수 있기를. 몸 대신 혼 드릴게요. 몸만 온전히 마른 땅 밟게. 다시. 그 감촉. 부드러운 모래. 곱게 갈린 모래. 발에 묻기를. 묻힐 수 있기를. 눈꺼풀 잠시 닫힌 사이. 내 배를 에워싼 악어들. 넷. 눈 밑 전부 물에 묻고. 눈만 둥둥. 내놓고. 실처럼 가는 눈동자 여덟. 가는 틈새 그만큼. 비친 내 얼굴. 느리게 끔뻑인다. 번뜩이며 그리는 원환. 나는 월식때 달처럼 어둠으로. 시커멓게 덮이고 싶었다. 저 세계 들어가고 싶었다. 단박에. 빙글빙글. 팽이처럼 도는 뱃머리. 가리키는 방향. 배와 나. 배 위 나. 내 몸과. 별 수없이. 누웠다. 밤하늘. 수 없이 많은. 별. 왜? 나는. 나는 어쩌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이렇게. 야만 위 띄운 얇은. 한 겹의 문명. 늙은 남자 든 긴 총. 조준경에 바투 붙인 눈. 질끈 감은 반대편. 눈. 이렇게 말했었다.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여럿 지킨 하나. 그러나 나는. 나는 하나 지키는 여럿. 오른쪽. 왼쪽. 전부 질끈. 감아 보아도. 별은 수 없다. 여전히. 영원할 것만 같고. 고난의 끝 있다는 사실. 잠시 잊은 채. 끝의 고난에만. 골몰하는 사이. 스르르. 원환 해체됐다. 악어들 일렬로 헤엄쳐 간다. 간다. 좌우로 꼬리 저으며. 살랑살랑. 저기 저쪽으로. 빙글 돌던 배. 그리던 원 느려지고. 뱃머리 가리키고 배꼬리가 따르는. 방향. 새로이 정해진 방향. 물이 그린 유선형의 꼭지점에 순순히 따르고. 갑자기 물살 세진다. 갑작스럽지 않다.
사실
악어와 물살 모두.
내가 몰랐을 뿐. 배는 뜨기 보다
흐른다.

선장들

배를 끌고가는
배에 끌려가는
배를 운전하는
배를 내버려 둔
배에 몸만 있는
배처럼 붕 뜬
배 위에서 죽은
배 밖에서 죽은
배보다 먼저
배보다 나중
바다에서의 죽음
바다 밖 죽음
배의 죽음
바다의 죽음
먼저의 죽음
나중의 죽음
나중의 먼저
먼저의 나중
어제의 내일
내일의 어제
선장의 선장
선장의 선장
들의 들



.


키(舵)?

눈밭의 동글

추운 겨울,
두꺼운 외투를 여러 겹 껴입고,
두꺼운 옷 입은 뚱뚱한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눈밭을 걸었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 다리보다 높이 쌓인 눈 헤치고
공룡 화석보다 깊은 발자국 파놓은 털복숭이.

까만 입술 밑
턱 밑 흰 수염에 눈 찌꺼기들 잔뜩 들러붙었다.

헥헥
뜨겁고 하얀 숨 뱉으며 뒤뚱뒤뚱 걷는다.

넌 뭘 위해 걷니?

아무 이유 없다고?!
그냥 걷는다고?!

ㅎㅎ

너 참 대단하구나!

...

(계속)

시집: 안과 밖의 500
인용문

“그놈이 배고프다고 하거든 무쇠 알을 먹이고,
목마르다고 하거든 구리 녹인 물을 마시게 해주어라.
형기가 다 차게 되면,
자연 그놈을 구출해줄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서유기 1권, 제7회
<제천대성은 팔괘로 속에서 도망쳐 나오고, 여래는 오행산 밑에 심원(心猿)을 가두다> 中

이름 없는 전경(前景)

이름을 알 수 있을 테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거든.
도감 따위를 뒤지거든.

무슨 나무, 무슨 나무, 무슨 나무.
글로 써놓으면 더 그럴 듯해 뵐 것들.
직접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예쁠 수도 있을테지.

이름들. 어쨌든
죄 많은 내 눈에 든 그런
무슨 나무, 무슨 나무, 무슨 나무.

바위, 옆으로 죽 늘어선.
키 작은 풀.
꽃.
부러진 가지.
흙.
파묻혀 이마만 슬쩍 내민 돌멩이,
반짝.

그 앞을 지나는 크고 작은 것들.
네 발로 걷는 것들.
날개를 펴는 것들.
먹는 것과 먹히는 것들.
먹다 남은 부스러기를 뜯는 것들.
조금 또는 많이 먹고서 푸드덕대고 사부작대다 스르르
사라지는 것들.
낮처럼 이름을 알고,
밤처럼 가려진 것들.
어느 누구도 아직 부르지 못한 것들.
어쩌면
죽는 그날까지.
나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런 것들, 내 앞을 지난다.
멀고 가깝게.

다섯 손가락 닮은 산 내 위를 짓누른 사이.

그리고
온갖 신과 귀신이란 것들. 역시
이름들.
알고 모르고. 알고 모르고.

폭포

생명이 사는 곳도 안 사는 곳도 아니었다.
물은 위에서 흐르는 것도 아래서 솟구치는 것도 아니었다.
하늘과 수면의 경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白은 흘러 靑이 되고 靑이 흘러 白이 되었다. 또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윤곽 가진 것들의 다리는 있지도 없지도 않았다.
희미한 그것을 끌고 날지도 걷지도 않았다.
산과 계곡
보기에 따라 이것이기도 저것이기도 꺼진 것도 솟은 것도
전부 아니라 해도 좋았다.
좋았다.
좋지 않다 해도.
그 모든 너머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살지 않으며
불 지피는 아궁이 있고 굴뚝 뚫리지 않으며
과거라고도 미래라고도 불리웠고 희망이라고 허무라고도 불렀던
그곳 뒤를 살 수도 지금 이곳을 살 수도
살지 않을 수도
눈 감을 수도
눈 감고 암흑에 기대어 기대 아닌 기대 열렬히
열렬히 바랄 수도
그렇게 앞 아닌 뒤
밖이 아닌 속
살 수도 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것.
확실하다고 고집 피우고도 싶은 것.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고개를 치켜 들었다
한숨을 쉬었다
반복했다.

밤, 자유

수천년 잠자던 고대도시처럼
깊고 낮은 구멍 속 말아 넣었던 비전祕傳 적힌 두루마리처럼
나는
오랫동안 잊혀지고 싶었다.
먼 미래
발견될 날을 기다리고 싶었다.
이끼로 뒤덮이고 거미줄로 장식된
폐허 닮은 무대가 되고 싶었다.
단 한 번 눈 깜빡이는 일 없이
날숨 새어나가는 일 없이
비참의 공기 들이쉬느니
무無의 떫은 맛 할짝이고 싶었다.
술 취한 노인네 주둥이
파르르르 떨며 흥얼거리던 곡조처럼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리고 싶었다.
고요를 작곡하고 싶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가끔은 세고 가끔은 여리게
또 정박과 변박으로 무분별히 흐를 수 있도록.
그곳에서 나는
모든 것을 중지시켜 얻은 자유,
칠흑 같은 어둠 속 뜬 눈이 본 광경이 되고 싶었다.
(어느 하나는 무한하겠지)
오직
눈꺼풀을 닫고 여는
양자택일만을 강요 받고 싶었다.
그러다
눈꺼풀마저 잘라내고 싶었다.

겨울의 침엽수

주위가 텅 빈 것을 보고
나는
겨울 나뭇가지처럼
기뻤다.
밑으로 내리깐 너희들의 눈은
복숭아 받힌 쟁반에 반사된 빛처럼
눈부셔 내 눈에는 비치지 않았다.
기약 없는 미래의 빛을 주절대는 너희 입은
두꺼운 진흙 밑에서 간헐적으로만 깜빡일 뿐
이어진 언어가 되지 못 했다.
너무 밝거나 너무 어두운 것은 뚜렷한
윤곽을 모두 지우고
지운 흔적 위로 끊임없이
어긋나는 추측과 짐작의 선線만을 지웠다 그렸다
반복했다.

내가 마신 것은 구리 녹인 물이 아니었다.
나는 목마르지 않았다.
내가 씹은 것은 무쇠 알이 아니었다.
나는 배고프지 않았다.
내가 마시고 씹은 것은
내가 마시고 씹은 것은
아님과 않은 것
아님과 않은 것이었다.
주위가
텅 비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
겨울의 침엽수는 내 옆에서 자라지 않았다.

(무수히 바뀌는 눈, 코, 입과 손들.)

느낌

“넌 눈에 살기가 있어.”
그치만 보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죽일 수 없었어.
뚫어져라 바라봐도 구멍난 건 없었지.
훔치는 건 가능했어.
있는대로 주워 담았지.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건 연결이야.
모은 것들을 연결해.
배치해.
자리를 바꾸기도 해.
영원한 건 없거든.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동과 서, 여기와 저기.
어둡던 것이 밝아져.
으악, 으악
소리치지.
아주 아주 구체적인 얘기를 들려주지.
잿빛의 털이 북실북실한 돼지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아.
얇고 예쁘지.
삶은 이런 물질들로 채워져.
가득해.
나는 반복을 좋아해.
늘어놓은 것들은 숲의 나무들처럼 제각기 다른 각도를 그리지만 내 눈 안에서 겹쳐져.
신선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냐.
열두 번도 더 해봤지.
바둑을 좋아한다고?
난 너희 눈동자들을 모아.
마음대로 안 된다고 징징대지 마.
아름답지 않아.
너와 나는 머릿니 같아.
머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닐 뿐이지.
“애써 찾으려고 하지 마라. 기다려야 한다.”*

돌 무더기 밑에서의 다짐:
고개를 돌리는 건 선을 긋는 것이다.
고개를 돌린다.
그어놓은 선을 넘지 말자!
그어놓은 선을 넘지 말자.
절제에서 풍부함 피어나나니.

여러 날 중
어느 하루 내게 그런 느낌이 왔다.
생각이 아니라.

*카미유 코로

...

(계속)

배경 설명

손오공은 천궁을 소란하게 하고 반도연회를 어지럽혔다.
처벌로, 손오공은 석가여래의 다섯 손가락이 변한 오행산 밑에 갇힌다.
속세의 시간으로 500년.
손오공은 천축국으로 대승 경전을 가지러 갈
당나라 스님을 기다린다.
서유기 원전에서 이 시간은 생략되어 있다.

번역한 시들
알콜 중독자


맬컴 라우리

취했을 때 나는 수 없이 죽었다.
절대 이름 모를 배가
침몰한 물처럼
술이 깼다.

심하게 요동치며 주위를 두른
내 옆의 오래된 따개비들은
인어 신부들이 내게 준 것이며
이끼처럼 티 없이 깨끗했다.

여기서 지금, 친척도 탐색도 없이,
고래들이 나를 둥지 삼고
내 안으로 자러 들어갈 지 모를
바다로 나는 가득차 있다.

(신성을 한 모금 마신
상층 대기의 저 천사들은
내 것보다 더 성스럽지만 덜 작별하는
안식처를 찾을 지 모른다)


Alcoholic

Malcolm Lowry

I died so many times when drunk
That sober I became
Like water where a ship was sunk
That never knew its name.

Old barnacles upon my sides
Ringed round with pitch and toss
Were given me by mermaid brides,
Immaculate as moss.

Here now, with neither kin nor quest,
I am so full of sea
That whales may make of me a nest
And go to sleep in me.

(Those angels of the upper air
Who sip of the divine
May find a haven holier
But less goodbye than mine.)

속 빈 자들


T. S. 엘리엇

미스타 커츠-그는 죽었다
늙은 가이를 위한 1 페니

1

우리는 속 빈 자들
우리는 잔뜩 먹은 자들
서로 기대어 있지
짚으로 채운 대가리, 아아!
우리의 건조한 목소리는, 우리
서로 속삭일 때
조용하고 의미 없다
마른 풀 속 바람처럼
혹은 우리 지하창고 안
깨진 유리 위 쥐의 발들처럼

형상 없는 모양, 색깔 없는 그늘,
마비된 힘, 동작 없는 제스처,

눈으로 직접 보며
죽음의 다른 왕국으로 건너간 이들은
우리를 기억한다-적어도 그렇다면-길 잃은
난폭한 영혼들이 아니라 오로지
속 빈 자들로
잔뜩 먹은 자들로.

2

내가 꿈속에서 감히 만나지 못할 눈들은
죽음의 꿈 왕국에
나타나지 않는다.
거기서, 눈들은
부숴진 기둥에 비친 햇빛이다
거기서, 나무 한 그루 흔들거린다
그리고 바람의 노래 속
목소리들은
희미해지는 별보다
더 멀고, 더 침통하다.

죽음의 꿈 왕국에
내가 더 가까워지지 않기를
또한 들판에서
그런 의도적인 변장도구들
쥐의 코트, 까마귀 가죽, 십자가 말뚝을 착용하기를
바람이 처신하듯 행동하며
더 가깝지 않게—

황혼 왕국에서의
그 마지막 만남이 아니라

3

이곳은 죽은 땅
이곳은 선인장 땅
여기서 돌 형상들이
자라난다, 여기서 그것들은
죽은 자의 손 애원하는 것을 받는다
희미해지는 별 반짝이는 아래서.

죽음의 다른 왕국에서도
이와 같을까
우리가 부드럽게 전율하는 그 시간에
혼자 깨어나서
키스하려던 입술은
부숴진 돌에 기도를 올린다.

4

눈들은 여기 있지 않다
여기 눈들은 있지 않다
죽어가는 별들의 이 계곡에
이 텅 빈 계곡에
우리 잃어버린 왕국의 이 부숴진 턱에

이 마지막 만남의 장소에서
우리는 서로 더듬고
이야기하길 피하고
부어오른 강의 이쪽 변에 모인다

볼 수 없다, 눈들이
영속하는 별들로,
죽음의 황혼 왕국의
여러 잎 가진 장미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면

속 빈 자들의
유일한 희망.

5

가시 덮인 배나무 주위를 돌자
가시 덮인 배나무 가시 덮인 배나무
가시 덮인 배나무 주위를 돌자
새벽 다섯시에

관념과
현실 사이
동작과
행동 사이
그림자가 떨어진다

왕국은 당신을 위한 것

개념과
창조 사이
감정과
응답 사이
그림자가 떨어진다

삶은 아주 길다

욕망과
발작 사이
역능과
존재 사이
본질과
하강 사이
그림자가 떨어진다

왕국은 당신을 위한 것

당신을 위한 것은
삶은
당신을 위한 것은

이것이 세계가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세계가 끝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세계가 끝나는 방식이다
쾅이 아니라 훌쩍이는 것.


The Hollow Men

T. S. Eliot

Mistah Kurtz-he dead
A penny for the Old Guy
I

We are the hollow men
We are the stuffed men
Leaning together
Headpiece filled with straw. Alas!
Our dried voices, when
We whisper together
Are quiet and meaningless
As wind in dry grass
Or rats' feet over broken glass
In our dry cellar

Shape without form, shade without colour,
Paralysed force, gesture without motion;

Those who have crossed
With direct eyes, to death's other Kingdom
Remember us-if at all-not as lost
Violent souls, but only
As the hollow men
The stuffed men.

II

Eyes I dare not meet in dreams
In death's dream kingdom
These do not appear:
There, the eyes are
Sunlight on a broken column
There, is a tree swinging
And voices are
In the wind's singing
More distant and more solemn
Than a fading star.

Let me be no nearer
In death's dream kingdom
Let me also wear
Such deliberate disguises
Rat's coat, crowskin, crossed staves
In a field
Behaving as the wind behaves
No nearer-

Not that final meeting
In the twilight kingdom

III

This is the dead land
This is cactus land
Here the stone images
Are raised, here they receive
The supplication of a dead man's hand
Under the twinkle of a fading star.

Is it like this
In death's other kingdom
Waking alone
At the hour when we are
Trembling with tenderness
Lips that would kiss
Form prayers to broken stone.

IV

The eyes are not here
There are no eyes here
In this valley of dying stars
In this hollow valley
This broken jaw of our lost kingdoms

In this last of meeting places
We grope together
And avoid speech
Gathered on this beach of the tumid river

Sightless, unless
The eyes reappear
As the perpetual star
Multifoliate rose
Of death's twilight kingdom

The hope only
Of empty men.

V

Here we go round the prickly pear
Prickly pear prickly pear
Here we go round the prickly pear
At five o'clock in the morning.

Between the idea
And the reality
Between the motion
And the act
Falls the Shadow

For Thine is the Kingdom

Between the conception
And the creation
Between the emotion
And the response
Falls the Shadow

Life is very long

Between the desire
And the spasm
Between the potency
And the existence
Between the essence
And the descent
Falls the Shadow

For Thine is the Kingdom

For Thine is
Life is
For Thine is the

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내가 화가가 아닌 이유


프랭크 오하라

나는 화가가 아니다, 나는 시인이다.
왜냐고? 내 생각에 난 차라리
화가인 게 낫겠지만, 아니다. 음,

예를 들어, 마이크 골드버그가
그림 하나를 시작하는 중이다. 난 잠깐 들른다.
“앉아서 한 잔 해” 그가
말한다. 난 마신다; 우린 마신다. 난 올려다
본다. “안에 정어리들이 있네.”
“응, 거기 좀 필요했어.”
“오.” 나는 가고 며칠 지나고
다시 잠깐 들른다. 그림은
진행 중이고, 나는 가고, 며칠
지나간다. 잠깐 들른다. 그림이
완성된다. “정어리들은 어딨어?”
남은 건 그저
글자들뿐, “너무 많았어,” 마이크가 말한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 나는 생각한다.
한 색깔에 대해: 오렌지색. 나는 오렌지에 대해
한 줄 쓴다. 꽤 빠르게 단어들로
한 페이지가 가득찬다, 줄이 아니라.
그리고 한 페이지 더. 더 많아야 한다
오렌지가 아니라
단어들이, 또 오렌지가 얼마나 끔찍하고
삶 또한 그런지. 시간은 지나간다. 심지어
산문에서도, 나는 진짜 시인이다. 내 시는
끝나고, 나는 아직도 오렌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열두 편의 시들, 나는
오렌지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느 날 갤러리에서
정어리들이라고 부르는 마이크의 그림을 본다.





Why I Am Not A Painter

Frank O’Hara

I am not a painter, I am a poet.
Why? I think I would rather be
a painter, but I am not. Well,

for instance, Mike Goldberg
is starting a painting. I drop in.
"Sit down and have a drink" he
says. I drink; we drink. I look
up. "You have SARDINES in it."
"Yes, it needed something there."
"Oh." I go and the days go by
and I drop in again. The painting
is going on, and I go, and the days
go by. I drop in. The painting is
finished. "Where's SARDINES?"
All that's left is just
letters, "It was too much," Mike says.

But me? One day I am thinking of
a color: orange. I write a line
about orange. Pretty soon it is a
whole page of words, not lines.
Then another page. There should be
so much more, not of orange, of
words, of how terrible orange is
and life. Days go by. It is even in
prose, I am a real poet. My poem
is finished and I haven't mentioned
orange yet. It's twelve poems, I call
it ORANGES. And one day in a gallery
I see Mike's painting, called SARDINES.

노래


레너드 코헨

기억하지 않고
나는 거의 침대로 갈 뻔 했다
내가 네 녹색 스웨터
단추구멍에 꽂아놓은
흰 바이올렛 네 송이를

또 그때 어떻게 내가 네게 키스했고
네가 내게 키스했는지를
마치 내가 너의 연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수줍어 하며


Song

Leonard Cohen

I almost went to bed
without remembering
the four white violets
I put in the button-hole
of your green sweater

and how I kissed you then
and you kissed me
shy as though I'd
never been your lover

메리앤을 기다리며


레너드 코헨

너의 냄새가 들어 있는
전화기를 잃어버렸어
나는 라디오 옆에서 살고 있어
모든 방송을 한 번에 켜두고
하지만 폴란드 자장가를 틀었지
잡음으로부터 골라냈어
소리가 사그라들어 난 기다리지 박자를 맞추고
거의 잠든 채 소리가 다시 돌아와

내가 전화기에 과도하게 킁킁거린 건
알면서 전화를 받았니
어쩌면 너의 숨결의 모든 부스러기를 갖기 위해
플라스틱이 뜨거워진 걸지도 몰라

그리고 만약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전화로 말해주는 건 어떻겠니
말다툼이라도 해보게


Wating for Marianne

Leonard Cohen

I have lost a telephone
with your smell in it
I am living beside the radio
all the stations at once
but I pick out a Polish lullaby
I pick it out of the static
it fades I wait I keep the beat
it comes back almost alseep

Did you take the telephone
knowing I'd sniff it immoderately
maybe heat up the plastic
to get all the crumbs of your breath

and if you won't come back
how will you phone to say
you won't come back
so that I could at least argue

시 50


레너드 코헨

나는 길을 잃었고, 당신 이름 부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세계에 맞선 날 것 그대로의 심장 박동, 그리고 눈물은 나의 잃어버린 승리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 있다. 항상 여기 있어 왔다. 세계는 모두 잊고 있고, 심장은 방향들의 격한 분노지만, 당신 이름은 심장을 통합하고, 세계는 그것의 공간 속으로 들어올려진다. 축복받은 건 여행자의 심장 속에서 그가 방향을 바꿀 것을 기다리는 이다.


Poem 50

Leonard Cohen

I lost my way, I forgot to call on your name. The raw heart beat against the world, and the tears were for my lost victory. But you are here. You have always been here. The world is all forgetting, and the heart is a rage of directions, but your name unifies the heart, and the world is lifted into its place. Blessed is the one who waits in the traveller's heart for his turning.

메뚜기


론 패짓

마음이 정신에 관해 생각하는 건
우습다,
메뚜기가 헬리콥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는 것처럼.

헬리콥터를 조종하는 동안
잠에 드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일어났을 때, 헬리콥터는 사라지고,
너 역시 마찬가지, 꿈 속에 남겨지고,

따라잡을 방법은 없고,
왜냐면 따라잡는 건 그 상황과

무관하니까. 너는
너 자신이고, 바로 지금,

마음은 너무 두려워서 눈을 감고
눈이 있다는 것도 잊는다

그리고 메뚜기, 널 헬리콥터라
생각하는 것이 네 등 위로 뛰어오른다!

그는 용감한 작은 메뚜기이고
절대 잠들지 않는다

그가 쓴 시는
네가 쓸 수 있거나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나은

항상 깨어있음의 행위이기에.
그리고 그는 날아가버린다.


Grasshopper

Ron Padgett

It's funny when the mind thinks about the psyche,
as if a grasshopper could ponder a helicopter.

It's a bad idea to fall asleep
while flying a helicopter:

when you wake up, the helicopter is gone
and you are too, left behind in a dream,

and there is no way to catch up,
for catching up doesn't figure

in the scheme of things. You are
who you are, right now,

and the mind is so scared it closes its eyes
and then forgets it has eyes

and the grasshopper, the one that thinks
you're a helicopter, leaps onto your back!

He is a brave little grasshopper
and he never sleeps

for the poem he writes is the act
of always being awake, better than
anything

you could ever write or do.
Then he springs away.

이 도시에는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레너드 코헨

이 도시에는 가구 딸린 방에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밤늦게 건물들을 살펴볼 때
맹세코 모든 창문에서 뒤돌아 나를 보는
얼굴 하나씩을 본다.
그리고 내가 외면할 때
몇이나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이 일에 대해 쓰는지 궁금하다.


I Wonder How Many People in This City

Leonard Cohen

I wonder how many people in this city
live in furnished rooms.
Late at night when I look out at the buildings
I swear I see a face in every window
looking back at me
and when I turn away
I wonder how many go back to their desks
and write this down.

이 가장 쓰라린 해안


맬컴 라우리

이로써 끝이지만, 끝이기에
넌 적어도 이 한 가지 확실함 덕에 기쁘다,
갈매기와, 친구를 위한 요트와 함께 한
유년기 푸르던 여름의 영원성 안에 네가 있을 때,
신이 선했을 때; 사랑이었을 때, 진실이었을 때; 바다였을 때, 바다였을 때; 육지였을 때, 육지였을 때. 그러나 감히 이 사소함에 대한 밑바닥으로부터의
면역에 기초하지 않다니!
언젠가 살해당한 이는 한 손으로 바다 양귀비들을 모았다
더 새빨개지도록, 더 까맣게 짓눌리도록
그리고 덜 발정난 죽음의 심장이 되도록... 오, 주여,
비록 재앙 없이는 이곳에 아무런 모험도 없지만
망가진 육체도, 죽은 부리도, 깃털도 없는
이 가장 쓰라린 해안에 관한
뼛속까지 깨끗한 기억을 씻어 주소서. 최후에는
반쯤 격정적인
과거와 단 한 번의 밀회를 허락하소서;
비록 아이들이 배신 당하고, 돈이 처음 키스 당했을 지라도
내 소금-회색 가슴에 모을 희박한 기쁨.


This Bitterest Coast

Malcolm Lowry

This is the end but since it is the end,
You are happy at least in this one certainty,
As you were in the eternity
Of childhood's blue summer with seagull and yacht for friend,
When God was good; love, true; sea, sea; land, land. Yet dare not to base immunity
From baseness on this triviality!
The murdered once gathered sea poppies with a hand
To be scarleter, to be pressed to the blacker
And less amorous heart of death ... Oh, Christ,
Wash up some bone-clear memory on this bitterest coast
Where is no wreck, dead beak nor feather
Though none venture here without disaster. Give at the last
One half-passionate tryst with the past;
Some little joy to gather to my salt grey breast
Though children were betrayed, and money was kissed first.


레너드 코헨

아주 아름다운 말솜씨로
이름만 불러도
여자들이 스스로를 내어주는
한 남자에 대해 들었다.

침묵이 우리 입술 위로 종양처럼 꽃피는 사이
내가 당신 몸 옆에서 벙어리 된다면 그건 내게
계단을 오르고 문밖에서 목청을 가다듬는
한 남자의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Poem

Leonard Cohen

I heard of a man
who says words so beautifully
that if he only speaks their name
women give themselves to him.

If I am dumb beside your body
while silence blossoms like tumors on our lips.
it is because I hear a man climb stairs and clear his throat outside the door.

어느 오후


레이먼드 카버

바다를 보지 않고 쓰고 있을 때,
그는 펜 끝이 떨리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조약돌들을 거쳐 썰물이 빠진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아니다,
그때 그녀가 아무 옷도 입지 않고 방으로 걸어들어가기로 했으니까.
나른하다, 그녀가 어딨는지도 전혀 확실치 않다,
잠시 동안은. 그녀가 이마에서 머리카락을
물결치게 한다.
눈을 감고, 머릴 숙이고, 변기 위에
앉는다. 제멋대로 벌린 다리. 그는
출입구를 통해 그녀를 본다. 아마
그녀는 그날 아침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할 것이다.
잠시 후 그녀가 한 쪽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볼 테니까.
그리고 다정하게 미소짓는다.


An Afternoon

Raymond Carver

As he writes, without looking at the sea,
he feels the tip of his pen begin to tremble.
The tide is going out across the shingle.
But it isn't that. No,
it's because at that moment she chooses
to walk into the room without any clothes on.
Drowsy, not even sure where she is
for a moment. She waves the hair from her forehead.
Sits on the toilet with her eyes closed,
head down. Legs sprawled. He sees her
through the doorway. Maybe
she's remembering what happened that morning.
For after a time, she opens one eye and looks at him.
And sweetly smiles.

나의 여인은 잘 수 있다


레너드 코헨

나의 여인은 잘 수 있다.
손수건 위에서.
만약 가을이라면
낙엽 위에서.
그녀의 옷단 앞에 무릎 꿇은
사냥꾼들을 본 적 있다.
잘 때조차 그녀는
그들을 외면한다.
그들이 준 유일한 선물은
그들의 변치 않는 비탄 뿐.
나는 손수건이나 낙엽을 위한
주머니들을 꺼낸다.


My lady can sleep

Leonard Cohen

My lady can sleep
Upon a handkerchief
Or if it be Fall
Upon a fallen leaf.
I have seen the hunters
kneel before her hem
Even in her sleep
She turns away from them.
The only gift they offer
Is their abiding grief
I pull out my pockets
For a handkerchief or leaf.

노래


로버트 크릴리

내 손에 쥐었던 게
무거워졌어. 네가 꼭
알아야만 해,
음란한 게 아니었단 걸.

밤이 와. 우리는 자.
그러니 무슨 얘긴지
알겠다면
모른 체 하지 마.

겉모습은
적들이 입는 거야. 너
그리고 나는
기도하며 살지.

속수무책. 속수무책
이라고 해야 되나.
그럴 거니.
날 어떻게 생각하니.

그 어떤 여자도 더
현명하지 않았어,
너보다. 이보다
더 맞는 말도 없지.

하지만 운명, 사랑, 운명이
날 두렵게 해. 내
손에 쥐었던 게
무거워져.


Song

Robert Creeley

What I took in my hand
grew in weight. You must
understand it
was not obscene.

Night comes. We sleep.
Then if you know what
say it.
Don't pretend.

Guises are
what enemies wear. You
and I live
in a prayer.

Helpless. Helpless,
should I speak.
Would you.
What do you think of me.

No woman ever was,
was wiser
than you. None is
more true.

But fate, love, fate
scares me. What
I took in my hand
grows in weight.

캘리포니아: 늦은 오후


피터 넬슨

수영장 물 들썩인다,
길게 뻗고 둘로 깜빡이는
눈들 속 먼 가장자리 위 놓인
흰 돌들 비치며: 게으른 불
같이 핥고 달아나는
손가락들.

불꽃 아래에는
희미하게 일렁이는 담쟁이
벽들과 유령 나무들 있다.
파랗고, 짙고 옅고,
갈증나는 초록.

아이들은 이제
가버렸다. 곧
표면은 더 무거워지고
스스로 매끈해질 것이다.
태양 붙들어 놓을 때까지
얼음처럼 꼼짝 않고.


California: Late Afternoon

Peter Nelson

The pool water heaves,
reflecting the white
stones on the far rim
in eyes that stretch,
wink in two: fingers
that lick and break
away like lazy fire.

Below the flames are
walls of shimmering
ivy, and phantom trees:
blue, dark and pale,
and green of thirst.

The children now
have gone. Soon
the surface will
grow heavier and
smooth itself until
it holds the sun
as still as ice.

이 죽은 편지


맬컴 라우리

읽지 않은 것의, 퇴보하는 것의, 방랑하는 주의력의
연옥에 내가 있을 때,
살아남은 것은 피어 헤드로 돌아가야 한다.
사별한 이들과, 눈물 흘리는 이들과 섞이기 위해.
화물선들이 제 마음을 조수(潮水)로써 증명하는 동안.
[그 마음은] 언급할 가치가 있는 정신이 아닐 것이며,
빈털터리 선원에게 추천할 것도 아닐 것이다:
유령 또한 아닐 것이다. 강풍 부는 곳에서 가련한 신문과 싸우는 내 아버지를 돕는,
또는 전에 한 번 그의 새 학교 모자를 경주시키려고 그랬듯
일할 때 쓰는 중산모 뒤편으로 날아가는.
나는 도와줄 누구도 찾지 않을 것이다.
소금-회색 버팀목은 스스로를 돌본다.
책꽂이 맨 위에 놓인 책보다 더욱 잿빛이 된
시인의 머릿속 비유를 나는 휘젓지 않을 것이다:
결코 회복되지 않은 상처들에 대해,
결코 돌아오지 않던, 빗속에서 항해하는 배들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이 말했다.
여전히 그 배들의 항해를 지켜볼 테지만, 나는 등을 돌릴 것이다.
사이공이나 적도 또는 포트 사이드 쪽으로.
나는 슬픔과 함께 살았다: 나는 엄중해질 것이다.
이 죽은 편지처럼, 절대 발송하지 않을 것이다.


This Dead Letter

Malcolm Lowry

When I am in the purgatory of the unread,
Of the backward, of those with wandering attention,
What survives must go back to Pier Head
To mingle with the bereaved, with those who weep
As freighters bear their hearts out with the tide.
It will not be a spirit worthy of mention,
Not one to recommend the down-and-out sailor:
Nor will it be a ghost to help my father
Struggling in the gale with his poor newspaper.
Or flying behind his bowler hat to work,
As once before to race his new school cap.
I shall not be looking for anyone to help;
The salt grey prop looks after itself.
I shall not stir a metaphor in a poet's head
Grown greyer than my book on his top shelf:
I spoke too much of wounds that never mend,
Of ships sailing in rain that never come back.
Still I shall watch them sail, but turn my back
To Saigon, the equator or Port Said.
I lived with sadness: I shall be stern
As this dead letter, I shall never send.

꿈 노래 14


존 베리만

삶, 친구들, 은 지루하다. 우린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결국, 하늘은 번쩍이고, 큰 바다는
갈망하고,
우리 자신은 번쩍이고 갈망하고,
더욱이 나의 어머니는 내가 꼬마일 때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언제든 지루하다고 고백하는 건 네게

내면 자원이 없다는 의미야.’ 난 이제 내게 내면 자원이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몹시도 지루하니까.
사람들이 날 지루하게 하고,
문학이, 특히 위대한 문학이
날 지루하게 하고,
날 지루하게 하는 사람들과 용맹한 예술을 사랑하는

헨리가 아킬레우스 만큼의 나쁜 곤경과 불평 때문에 날 지루하게 한다.
그리고 고요한 언덕, 진(gin), 은 지겹게 보이고 웬일인지 개는
스스로와 제 꼬리를 산이나 바다나 하늘로 제법 많이 가져갔다:
나와 (꼬리) 흔들기를 남기고.


Dream Song 14

John Berryman

Life, friends, is boring. We must not say so.
After all, the sky flashes, the great sea yearns,
we ourselves flash and yearn,
and moreover my mother told me as a boy
(repeatingly) ‘Ever to confess you’re bored
means you have no

Inner Resources.’ I conclude now I have no
inner resources, because I am heavy bored.
Peoples bore me,
literature bores me, especially great literature,
Henry bores me, with his plights & gripes
as bad as achilles,

who loves people and valiant art, which bores me.
And the tranquil hills, & gin, look like a drag
and somehow a dog
has taken itself & its tail considerably away
into mountains or sea or sky, leaving
behind: me, wag.

시 111


레너드 코헨

사람마다
각자의 배신법이 있다
혁명
이건 내 것이다


Poem 111

Leonard Cohen

Each man
has a way to betray
the revolution
This is mine

창문들


프랭크 오하라

아주 깨끗하고 파란 이 공간은
우리가 그 안에 무얼 놓든

상관하지 않는다 비행기들은
제 숨결 속에 사라지고 탑들은 익사한다

우리 마음도 두근거린다
우리가 허공, 하늘빛 미소

여인의 뒤통수와 사랑에 빠졌을 때
결코 돌아오지 않을

비행을 한다 오 내 마음!
태어난 레오나르도를 생각한다

완전한 눈으로 삶을 껴안았지
그리고 지금은 기념비 속에 죽어 있어

길에 있는 하늘을 부드럽게 하는
봄 바람은 없다

레이스 달린 끝을 가진 치마의 무자비한 호(弧)를
잠잠하게 하는 향수는 없다


Windows

Frank O’hara

This space so clear and blue
does not care what we put

into it Airplanes disappear
in its breath and towers drown

Even our hearts leap up when
we fall in love with the void

the azure smile the back of a
woman's head and takes wing

never to return O my heart!
think of Leonardo who was born

embraced life with a total eye
and now is dead in monuments

There is no spring breeze to
soften the sky In the street

no perfume stills the merciless
arc of the lace-edged skirt

사랑 요리사


론 패짓

너에게 저녁 만들어 줄게.
앉아서 신발이랑 양말
벗어. 사실은 나머지 옷들도 다
벗고, 다이키리 한 잔 해.
음악 틀고 춤을 춰.
집 주위에서, 안이랑 밖에서.
밤이고 이웃들은
자고 있어, 저 멍청이들. 그리고
별들은 밝게 빛나고,
너, 너 배고픈 것을 위해
불을 켠 버너가 내게 있어.


The Love Cook

Ron Padgett

Let me cook you some dinner.
Sit down and take off your shoes
and socks and in fact the rest
of your clothes, have a daquiri,
turn on some music and dance
around the house, inside and out,
it’s night and the neighbors
are sleeping, those dolts, and
the stars are shining bright,
and I’ve got the burners lit
for you, you hungry thing.

죽음을 위해


맬컴 라우리

지옥의 고문은 엄중하고, 불은 맹렬히 타오른다.
그러나 독수리들은 대기를 거슬러 등을 돌린다.
더 아름답게, 시원한 햇빛 속 바람 부는 결에 맞춰 뜬 갈매기들보다
혹은 결코 아주 높이 모험하지 않았던
삶의 기만으로서의 희망을 위해
운명의 베틀을 돌리고, 독수리의 비행에 두 다리 벌리고 올라탄
정신병원 안 선풍기들보다.
만약 그저 날기 위해, 죽음이 날 수 있다면,
죽음을 위해, 삶은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For the love of dying

Malcolm Lowry

The tortures of hell are stern, their fires burn fiercely.
Yet vultures turn against the air more beautifully than seagulls float downwind in cool sunlight,
or fans in asylums spin a loom of fate
for hope which never ventured up so high
as life’s deception, astride the vulture’s flight.
If death can fly, just for the love of flying,
what might not life do, for the love of dying?

라흐마니노프의 생일에


프랭크 오하라

파란 창들, 파란 옥상들
그리고 비의 파란 빛,
내 거대한 귓속으로 쏟아지는
라흐마니노프의 이 인접한 악구들과
나의 눈멂으로 떨어지는 눈물들.

그 없이 나는 연주하지 않는다.
특히 그의 생일날 오후에는. 운이 좋았다면
당신은 내 선생이고
나는 당신의 유일한 학생이었을 테지.

그리고 난 항상 다시 연주했을 거야.
리스트와 스크랴빈의 비밀들은
건반 위로 내게 속삭였어,
해가 잘 안 드는 오후에! 여전히
내 폭풍우 치는 가슴 속에 자라며.

오직 내 눈만이 새파랬을 거야, 내가 연주한 대로.
그리고 모든 러시아인이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은 내 손가락 마디를 톡톡 두드렸지.
내 손가락을 당신의
차갑고 피로한 눈 위에 다정히 얹으며.


On Rachmaninoff’s Birthday

Frank O'hara

Blue windows, blue rooftops
and the blue lights of rain,
these contiguous phrases of Rachmaninoff
pouring into my enormous ears
and the tears falling into my blindness

for without him I do not play,
especially in the afternoon
on the day of his birthday. Good
fortune, you would have been
my teacher and I your only pupil

and I would always play again.
Secrets of Liszt and Scriabine
whispered to me over the keyboard
on unsunny afternoon! and growing
still in my stormy heart.

Only my eyes would be blue as I played
and you rapped my knuckles,
dearest father of all the Russias,
placing my fingers
tenderly upon your cold, tired eyes.


론 패짓

나는 집 안에 있다.
바깥 날이 좋다: 차가운
눈 위에 따스한 태양.
봄의 첫 날
또는 겨울의 마지막.
내 다리는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가 문밖을
나서고, 내 윗몸 반은
여기서 타자를 치지.


Poem

RON PADGETT

I’m in the house.
It’s nice out: warm
sun on cold snow.
First day of spring
or last of winter.
My legs run down
the stairs and out
the door, my top
half here typing

여름-하이쿠


레너드 코헨

프랭크와 매리언 스콧을 위해

침묵

그리고 더 깊은 침묵

귀뚜라미가

망설일 때

Summer-Haiku

Leonard Cohen

For Frank and Marian Scott

Silence

and a deeper silence

when the crickets

hesitate

칸예 웨스트는 피카소가 아니다


레너드 코헨

칸예 웨스트는 피카소가 아니다
나는 피카소다
칸예웨스트는 에디슨이 아니다
나는 에디슨이다
나는 테슬라다
제이지는 어떤 것의 딜런도 아니다
나는 어떤 것의 딜런이다
나는 칸예 웨스트의 칸예 웨스트다
한 상점에서 다른 상점으로
개똥 문화의 위대한 가짜 전환을 이룬
그 칸예 웨스트
나는 테슬라다
나는 그의 코일이다
침대처럼 보드라운 전기를 만드는 그 코일
나는 칸예 웨스트가 그라고 생각하는 칸예 웨스트다
그가 당신의 궁둥이를 무대에서 밀쳐낼 때
나는 진짜 칸예 웨스트다
나는 이제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런 적이 없다
나는 오직 전쟁을 치룬 후에만 활기를 띤다
그리고 우린 아직 전쟁을 치루지 않았다

2015년 3월 15일


KANYE WEST IS NOT PICASSO

Leonard Cohen

Kanye West is not Picasso
I am Picasso
Kanye West is not Edison
I am Edison
I am Tesla
Jay-Z is not the Dylan of anything
I am the Dylan of anything
I am the Kanye West of Kanye West
The Kanye West
Of the great bogus shift of bullshit culture
From one boutique to another
I am Tesla
I am his coil
The coil that made electricity soft as a bed
I am the Kanye West Kanye West thinks he is
When he shoves your ass off the stage
I am the real Kanye West
I don’t get around much anymore
I never have
I only come alive after a war
And we have not had it yet


March 15, 2015

제목 불명 (재미에 대한 감각의 죽음...)


맬컴 라우리

재미에 대한 감각의 죽음.
유머 감각의 죽음.
감각의 죽음.
죽음.
이로부터 어떻게 회복할 텐가?

무엇이 두려운가.
까발려지는 것.
그런데 왜 항상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숨는 것.
그런데 왜 밖에 나가 스스로를 전시하는가?
무엇을 찾는가?
잊혀지는 것.


Malcolm Lowry

Death of a sense of fun.
Death of a sense of humour.
Death of sense.
Death.
How do you recover from this?

What do you fear?
Being found out.
Then why do you always give yourself away?

What do you want to do?
Hide.
Then why go out and make an exhibition of yourself?
What do you seek?
Oblivion.

화산이 어둡다


맬컴 라우리

화산이 어둡다, 그리고 갑자기 천둥이
대농장들을 에워쌌다.
이 어둠 속에서, 나는 번식 중인 사람들을 생각한다.
날개 달린 몸을 굽히고, 무릎 꿇고, 앉고, 일어서고,
大자로 누워
신음하는 수억, 수조, 수백만의 사람들,
그리고 내팽개쳐진 영원한 여인의 손.
그들의 내장이 거대한 바위로 얼어붙는 걸 본다.
이제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외침들, 죽음의 신음일지도 혹은
사랑의 신음일지도 모르는—

THE VOCANO IS DARK

Malcolm Lowry

The volcano is dark, and suddenly thunder
Engulfs the haciendas.
In this darkness, I think of men in the act of procreating,
Winged, stooping, kneeling, sitting down, standing up,
sprawling,
Millions of trillions of billions of men moaning,
And the hand of the eternal woman flung aside.
I see their organ frozen into a gigantic rock,
Shattered now...
And the cries which might be the groans of the dying
Or the groans of love—

...

(계속)

난해(難解)를 판별하기
난해(難解)를 판별하기?

현대를 살며 난해한 텍스트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인문, 예술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피할 수 없거나 피하고 싶지 않다면?
대책 없이 난감해 하지 않고,
대충 알아들은 척 둘러대지 않고,
공포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싶지 않다면?
원인을 찾아, 난해를 판별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

# 난해의 판별과 그것에 대한 비평적 판단은 별개이다.

인용문 1

원인이 결과 뒤에 오도록 하라. 원인이 결과와 함께 나오거나 앞에 나오지 않게 하라.

- 로베르 브레송

???

인용문 2

파인만의 문제 해결 알고리즘:

(1) 문제를 쓴다.
(2) 매우 깊게 생각한다.
(3) 답을 쓴다.

판별을 시작하기

어느 텍스트가 난해하다고 느껴질 때, 그 원인은 셋이다.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가 원인인 경우

텍스트는 이해 가능하게 작성되었지만, 독자의 사정으로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이다. 네 가지 경우로 나뉜다.

흥미가 부족한 경우

텍스트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 중 어느 것 하나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으면 이해의 기회 자체가 없다.

의지가 부족한 경우

텍스트 이해에 필요한 만큼의 노력을 투여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지구력이 부족한 경우

텍스트 이해에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투여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지적 능력이 부족한 경우

텍스트 이해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지능과 교육 수준에 미달한 경우이다.

독자가 아니라 텍스트가 원인인 경우

독자에게 아무 문제가 없고 텍스트가 난해의 원인을 제공한 경우이다. 두 가지로 나뉜다.

이해 불가능한 텍스트인 경우

이해 불가능한 경우는 두 가지로 나뉜다.

의도적 불가해의 경우

의도적 불가해의 경우는 두 가지로 나뉜다.

안티-테제, 비판적 코멘트로서의 불가해

특정 시공간에서 지배적인 의미 생산 체계, 조건에 대한 안티-테제, 비판적 코멘트로서 불가해가 생산된 경우이다. 맥락을 알면 이해 가능하다.

사적 정보가 포함된 불가해

맥락이 공개된 적 없는 사적(private) 정보가 텍스트의 이해에 필수적인 경우이다. 이 경우 또한 맥락을 알면 이해 가능하다.

비의도적 불가해의 경우

이해 가능한 텍스트를 의도했으나 실패한 경우이다.

이해 가능한 경우

이해 가능한 경우는 세 가지로 나뉜다.

문체가 원인인 경우

예컨대 만연체와 같은 까다로운 문체가 그렇다.

구조 또는 전개 방식이 원인인 경우

의도적으로 또는 비의도적으로 '난삽'해 보이는 경우이다.

내용의 난이도가 높은 경우

내용 자체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경우이다.

독자와 텍스트 둘의 공통 원인인 경우

의미망과 의미망을 형성하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세대, 시대, 지역, 여기서 형성된 상식, 문화, 관습, 감각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시공간의 차이로, 지금-여기에서 당연히 이해될 만한 것이 지금-여기가 아닌 때와 장소에선 이해 범위 밖일 수 있다.

!!!

+++

원인은 외따로 혼자 있기도, 여럿이 함께 결합해 있기도 하다. 생선 살 바르듯, 하나씩 구분해 판별해 본다면, 더 이상 덩치 큰 괴물 앞에 선 것처럼 두렵거나 난감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질서와 함께합니다.

정다혜와 함께합니다.

유병철과 함께합니다.